(소설) 19금 아님!!
그린 망고(Green Mango)-3부
집주인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가 필리핀 여자를 결혼한다는 뜻은 그 여자 집안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부잣집 여자가 아니라면 당연한 일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외국인은 다 부자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누구라도 자기들보다 부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필리핀 여자를 만날 거면 잘 생각해서 만나라...”라고.
카오리가 무슨 사정으로 떠났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녀가 세부의 가난한 지역에 살아야 할 정도로 풍족하지 않았다는 것과
카잔은 시집간 누이들을 건사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안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이다.
나는 ‘J파크 호텔’ 외국인 직원들의 급여를 알고 있다.
카오리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없었으면 그 월급으로는 여기서 혼자 살기도 빠듯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틀릴 때도 있지만 맞는 경우도 많다.
사랑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 의사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일이 더 많게 마련이다.
나는 카오리가 줬다는 '그린 망고'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오다 돌아서 집주인에게 물었다.
-나 : 이 망고 혹시 마당에 있는 저 나무에서 딴 건가?
-집주인 : 아닐걸?
-나 : 그럼 시장에서 산 거겠네?
-집주인 : 그렇겠지, 왜? 뭐 잘못됐어?
-나 : 아니, 얼마 전에 카오리가 마당에서 딴 걸로 만든 거라며 그린 망고 셰이크를 준 적이 있거든.
-집주인 : 그래? 나는 카오리에게 준 적 없는데? 집사람이 줬나?
-나 :.....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카오리가 줬다는 그린 망고를 바구니에 담아 냉장고 위에 올려놨다.
“이메일이라도 주고 가지”이런 말을 중얼거린 거 같다.
그린 망고는 시어서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은 그냥 먹기가 힘든 과일이다.
현지인들은 소금이나 새우젓 같이 생긴 젓갈에 찍어먹기도 하는데 이러면 우리가 아는
망고의 맛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그린 망고는 주스나 셰이크를 만들면 누구라도
맛있게 먹지만 익숙지 않은 사람은 먹기 힘든 과일이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은 잘 익은 노란 망고보다 초록색의 그린 망고를 좋아한다.
그린 망고를 상온에 일주일 정도 놔두면 노란색 망고가 된다.
한국인들이 아는 평범한 망고가 되는 것이다.
초록색이 노란색으로 변하면서 신맛은 사라지고 달콤한 단맛이 생긴다.
그 노란 망고를 또 일주일쯤 놔두면 심한 단내를 풍기며 새카만 색으로 변한다.
새카맣게 변한 망고는 찍어서 먹어보면 술맛이 난다. 이건 먹기가 어렵다.
카오리가 떠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꿀 휴식을 취하며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카오리와 그녀가 준 그린 망고 생각이 났다.
냉장고 위를 보니 덩그러니 빈 바구니만 남아 있었다.
아마 내가 기억도 못하는 순간에 먹어치운 것 같았다.
냉장고 위의 빈 바구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언제 망고를 먹었지?"
"내가 먹기는 했겠지?”
그리고
“카오리는 왜? 그린 망고를 주고 갔을까?”
“카오리의 사랑은 '그린 망고' 같은 것이었을까?”
인간은 가끔 별거 아닌 일들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할 때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카오리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녀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멋지게 어울렸던 호텔 유니폼과 섹시한 검은색 미니 원피스.
짧은 반바지 때문에 맛도 모르고 마셨던 그린 망고 셰이크 등등..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내게 그린 망고 몇 개를 주고 떠난 아리따운
일본인 아가씨 생각이 난다. 지금은 잘 살고 있으려나?
사라질 것들은 사라져 가겠지만 남는 것은 이렇게 남는가 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