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랑끝 May 18. 2023

[보홀 이야기] #00, 나도 커피 이야기

('딴지 정불'에 멋진 커피 이야기가 올라와 나도 한 번 써 봄)

나도 커피 이야기.

('딴지 정불'에 멋진 커피 이야기가 올라와 나도 한 번 써 봄)


언제 적 이야기냐? 한국에 스타벅스가 없었을 때 이야기다. 

아니 검색해 보니 한국 스타벅스 1호점은 1999년 7월 27일에 문을 열었다네.

그럼 스타벅스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던 때 이야기다.

그니까 꽤 예전?


알바인지 직업인지 모를 몇 가지 일을 전전하며 삶이 정말 고달프기만 할 때였다.

어찌어찌하여 어찌어찌 돼서 잠깐 노량진 근처에 산 적이 있다.

낮에는 몸 쓰는 일, 밤에는 운전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다.

하루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제가 드디어 직업을 얻었습니다."

"뭐냐??"

"커피숍을 오픈했습니다."

"다방 말하는 거냐?"

"ㅎㅎㅎ, 다방 하고는 좀 다른 겁니다. 원두 볶습니다."

"어쨌든 알았다. 한 번 가마"


이렇게 해서 며칠 뒤 두루마리 휴지 뭉치를 들고 그곳을 찾았다.

그곳은 노량진 고시촌 입구 사거리에 있는 작은 상가였다.

딱, 봐도 특이한 구조의 가게였는데 1층에는 커피 볶는 기계와 원두가 쌓여 있고 

테이블은 2개밖에 없었다. 지하에도 테이블이 있었지만 그리 많진 않았다.


빈티지한 분위기라고 하나?

당시에는 흔치 않던 시멘트 색을 그대로 노출시킨 모던한 분위기의 작은 커피숍이었다.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마셔봤다.

태어나서 한 번도 블랙커피를 마저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꽤나 큰 도전이었다.

쓰고 맛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중무장이 된 상태에서 예의 어쩔 수 없이 커피잔을 들었다.

그런데 웬걸? 구수하고 쌉싸름한데 신맛까지 나는 것이 이게 숭늉보다 훨씬 맛있는 거였다.

"어라, 이거 맛있네?" 이것이 내가 원두커피를 만난 시작점이었다.

 

그날 그 친구는 이런저런 맛의 커피를 계속 내왔고 나는 두 시간이 넘게 커피의 역사와 교역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셨다. 


헤어질 때 그 친구는 내게 원두 한 봉지를 선물로 다.

"이거 어떻게 먹는지 모르는데?"

"방금 제가 하는 거 보셨잖아요. 그냥 뜨거운 물 부으면 돼요."

"그래도 뭔가 장비가 많이 필요할 거 같은데"

"그냥 컵 하고 필터만 있으면 돼요. 제가 필터 몇 장 챙겨드릴게요."


며칠 뒤 비 오던 날.

밖에 나가기가 싫어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문득 그 커피 생각이 났다.

본 걸 흉내 내서 커피 필터를 이렇게 저렇게 해서 컵 위에 올리고  처음으로 커피를 내렸다. 

방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은 빗소리와 함께 너무나 깊은 자극을 내게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매일 커피를 내린다.


한 번은 평소에 없던 현기증이 자꾸 나서 유사 의료행위를 하는 친구에게 상담을 했다.


"요새 가끔 어지럽고 그러네"

"요즘 뭐 급격히 생활 습관 바뀐 게 있나요?"

"글쎄 없는 거 같은 데."

"음~~, 술을 많이 드신다든가, 음식물이 소화가 안 된다던가?"


"음~~ 글쎄. 요즘 커피를 좀 많이 마시긴 하지."

"무슨 커피요?"

"원두커피 내려 마셔."


"얼마나 드시는데요?"

"머그잔으로 하루 5~6잔 정도?"

"네~에~???"


"왜? 원두커피는 설탕이 안 들어서 많이 마셔도 된다던데"

"으이그~~~, 그래도 그렇게 많이 드시면 어떻게요."

"왜 어때서?"

"아무리 그래도 카페인 양이 있잖아요. 일단 커피 좀 줄여 보세요."

"그런가?"


이 날 이후 난 커피를 하루 두 잔으로 줄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잔으로 줄였고, 녹차로 바꾸면서 이틀에 한 잔으로 줄였다.

그랬더니 현기증은 차츰 사라졌다. (사실 현기증은 체중 문제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커피를 안 마실수는 없었다.

녹차도 좋긴 했지만 커피의 그 강렬한 맛과 카페인의 유혹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커피를 다시 마시게 됐지만 전처럼 무식하게 마시진 않는다.


그 후 난 되도록이면 커피숍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 한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지만 아침에 집에서 내린 커피 한 잔이면 내가 즐길 커피의 양은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가끔 손님이나 동료들과 어쩔 수 없이 커피숍에 갈 때면 크림이 잔뜩 얹은 예쁜 색깔의 달콤한 

커피를 시킨다. 그럼 꼭 이런 말하는 사람이 있다. 

"커피 마실줄 모르네, 커피는 아메리카노지..."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한다.

"당 떨어졌어... ㅎㅎㅎ"


커피 마시는 일은 이제 내게 생활의 일부가 됐다. 

원두가 떨어지면 동네 가게에서 인스턴트커피를 사 와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신다.

이건 이것대로 저건 저것대로 커피는 언제나 맛있는 것 같다. 


물론 진짜 맛있는 커피를 만날 때면 말도 안 되게 기쁘긴 하다.

어제 비 오는 초콜릿힐을 보며 양철지붕 기사식당에서 커피를 마셨다.

필리핀에서는 맛있는 커피 마시기가 쉽지 않은데 그 집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초콜릿 힐, Bohol, Philippines. 2023.5.


혼자 오토바이 여행할 때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그땐 내가 너무 피곤해서 

커피 맛이 좋은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다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거긴 원래부터 좋은 원두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비리스타의 실력도 좋았다. 

이런 곳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해주지 말아야지.... ㅋㅋㅋ)


살면서 인간이 평생 좋아할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될까? 

내게 커피 이야기를 해주며 여러 커피를 마셔보게 했던 친구의 작은 수고로움  

덕에 나는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됐다. 고맙게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이 많으면 삶은 행복해진다. 

커피 맛을 알든 와인 맛을 모르든, 위스키, 브랜디, 럼을 구분 하든 못 하든 밥 먹고 

숨 쉬고 잠자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즐기는 것이 많다면 

삶의 풍요로움은 몇 배가 될 것이다. 또한 그걸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전생에 지구를 구했을 확률이 높다. 


새롭게 좋아할 것이 또 생길지 모르지만 계속 찾아보며 살 생각이다.

그렇게 살면 시간이 많이 지난 뒤 후회가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홀 이야기] #00, '래시가드'의 시대 끝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