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제 모든 독후감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만.. 처음으로 미리 알립니다. 이 소설은 특히 결말을 알아가는 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3/4 지점을 읽을 때까지도 내용이 헷갈리지만 포기 말고 끝까지 읽어보시길. 독보적인 대작입니다..!)
그는 누구였나? 그는 누구일 수 있었나?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소름과 문득 떠오르는 미소의 신'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만지면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하면 떠날 수 없었고, 말을 하면 귀 기울일 수 없었고,싸우면 이길 수 없었다.
암무는 그가 그리웠다. 온몸으로 그를 갈망했다. /p.450
<작은 것들의 신>은 인도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처음 낸 소설(1997년도)이자 맨부커 수상작입니다. 작가는 인도에서 페미니즘, 환경 문제, 정치 문제, 신제국주의 등 다양한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가입니다.
작품 배경인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에서는 공산주의가 퍼졌고, 시리아 정교와 힌두교 사람들이 갈등했으며, 식민지배로 영국 문화를 받아들였고, 카스트제도가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배경이 작품에 녹아있습니다.
역사가, 카스트제도가 정했습니다. 불가촉천민은 공공도로에서 걸으면 안 되고, 발자국을 지워야 되고, 말할 때는 입을 가려야 한다고. 브라만 계급이나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부딪히거나, 발자국을 밟거나, 오염된 숨결이 닿아 불결해지지 않도록. 신분에 따른 차별이 철저하므로 누가 누구를 사랑해야 되는지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암무는 그가 알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도 시선을 돌렸다. 역사라는 악귀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을 다시 그 오래된 상처투성이 가죽으로 포장해서 그들이 진짜 살던 곳으로 끌고 갔다. '사랑의 법칙'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주는 곳으로. /p.246
하지만 '사랑의 법칙'을 어기고 소설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사랑을 합니다. 불가촉천민 남자 벨루타와 가촉민 여자 암무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봅니다. 이야기는 이혼한 암무의 쌍둥이 아이들, 에스타와 라헬 시점에서 주로 서술됩니다. 쌍둥이는 어린 나이에 목격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서 벌금을 거둬들이는지.. 그렇게 ‘에스타의 어린 시절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나가버렸’습니다.
'역사의 집'의 뒷베란다에서, 자신들이 사랑하는 그 남자가 맞아서 고통받는 동안 (...) 쌍둥이 대사는 두 가지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 교훈'. 피부가 검은 사람은 피가 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짠 짠)
그리고 '두 번째 교훈' 그래도, 냄새는 난다. 역겨운 달콤함. 바람에 실려오는 오래된 장미향 같은. (짠 짠) /p.423
작은 사람들은 일상이 소중합니다. 아름다운 순간들을 반짝이는 구슬 꿰듯 알알이 간직합니다. 신분상 가장 아래에 있는 파라반 벨루타. 당시에 용납이 어려운 이혼을 한 여성 암무. 그들이 약속할 수 있는 건 당장 내일뿐입니다. 그마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단 며칠을 함께하며 서로의 존재를 위로하는 작은 힘이 따뜻하면서도 슬픕니다. 이야기에서 인간 본성을 억압하는 규범과 인식을 바꿔야 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그들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웃었다.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작은 애벌레에. (...)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p.462-463
소설 맨 앞에는 존 버거의 인용문이 나옵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마치 유일한 이야기인양 이야기되는 일은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마다 복잡한 배경과 여러 관점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예를 들면 '말과 감정 표현을 않는 이상한 에스타'처럼 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는 '이혼한 엄마 암무와 쌍둥이 동생 라헬을 잃은 불행한 아이'라는 이야기이자 '사랑하는 벨루타 아저씨가 죽도록 맞는 걸 목격하고 그의 앞에서 거짓 증언' 해야 했던 이야기이자 '큰 카스트 제도에서 짓밟힌 엄마와 아저씨의 작은 사랑' 이야기니까요.
건축을 전공한 작가는 소설을 참 정교하게 설계했습니다. 시처럼 독창적인 언어로 색칠했고요.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며 베일에 싸인 사건을 조금씩 보여줍니다. 두 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니까요. (짠 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