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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선 Oct 13. 2018

여기 사람이 있다

<체공녀 강주룡>을 읽고


여기 사람이 있다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습니다. (...) 평양 평원 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였던 강주룡은 1931년 일제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반대해 높이 12미터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하며,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쳤습니다. 당시 조선의 남성 노동자 임금은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조선 여성노동자는 그의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저항으로 지사는 출감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지만,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73주년 광복절 축사 中


 지난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강주룡을 언급했다. 강주룡은 조선 최초로 높은 곳에 머무르는 체공滯空 농성을 벌인 노동 운동가이다. 당대에 함께 활동한 남편 최전빈, 백광운 장군, 사회운동가 정달헌은 조명을 받았지만 그녀는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오른 듯하다. 역사 속에 묻혀있던 그녀가 여기 있다.


 <체공녀 강주룡>은 그녀의 삶을 20세부터 30세까지 다룬 전기 소설이다. 신인 작가 박서련이 강주룡이라는 인물에게 반해서 쓴 책이다. 사료가 많지 않아서 '동광 신문'에 실린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고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고 한다. 저자가 간도 사투리를 어찌나 생생하게 재현했는지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작가 새터민 설까지 제기했다고 한다. 1부에서 남편과 함께 대한독립단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야기를, 2부에서 평양의 고무 공장에서 일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작품은 일방적인 임금 삭감 통보에 투쟁하는, 지붕 위 그녀를 향해 외치는 말로 끝난다. '저기 사람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강주룡은 사랑해서 알게 되고, 전과 같지 않은 것들을 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큰 뜻을 둔 게 아니라 점차 눈을 떴기 때문에, 어쩌면 시작은 평범했기 때문에, 인물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란다는 남편 전빈이 걱정되어서 그를 따라 독립운동을 했다. 또, 평양 고무공장에 같이 다니던 동료 삼이 대신 노동조합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본인이 속한 파업단 49인의 임금 감하가 결국 2천3백 고무 직공 전체의 감하를 불러올 원인이 될까 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그녀가 지붕 위 하늘에 머물면서 한 체공 연설은 다음과 같다.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p.241


 나는 주룡이라는 인물을 사랑해서 알게 되었고, 알고 보니, 보이는 게 전과 같지 않다. 이제야 지붕 위 사람들이 보인다. 2018년 10월 오늘날에도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 목동 열병합발전소의 75m 굴뚝에서 파인텍의 해고노동자 홍기탁, 박준호 님이 공장 정상화와 단체 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330여 일째 농성 중이다. 전주시청 앞 조명탑에서 택시 노동자 김재주 님이 택시 사납금제 폐지와 월급제 시행을 요구하며 4백여 일째 농성 중이다. 충주 신축 아파트 현장 20m 5층 옥상에서 건설 근로자 두 분이 임금 체불에 항의하며 2시간 농성을 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여기 있다. 모든 노력이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는 세상을 원한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여성 롤모델


 저자는 '일하는 여성 영웅'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처음엔 내가 무어라고, 이렇게 강인한 여성을 롤모델로 삼을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고, 특별히 행동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에게 문장들이 말을 걸며 용기를 주었다. '삶이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투쟁하는 것'이라고, '부엌데기이고자 자처하면 부엌데기 취급을 받고 독립군 행세를 하면 독립군 취급을 받는 거'라고 말이다. 사회 구조적인 한계는 존재하므로, 모든 걸 개인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얘기다.


돼먹지 못한 인간이 한 고약한 말은 잊으면 그만이다.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p.140


 고무 공장장은 주룡이 모단 껄modern girl이 아니라고 업신여기며 때려도, 주룡은 툭툭 털고 일어나 '고무 냄새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지 않으면 어디에 쓴담'하고 신여성 특집 잡지책을 산다. 고된 가사 노동을 마치는 하루 끝에서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노동조합 세미나에 인텔리 에리뜨 남자들만 모이자, 부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는 모순을 지적한다. 감옥에서 일주일도 굶어봤는데 사흘 단식쯤이야 쉽지 않겠냐고 농담을 던진다. 정말이지 사이다 같은 매력이 넘친다. 이처럼 당당한 여성 롤모델을 <체공녀 강주룡> 책에서 만나보길 열렬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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