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
분노의 존재를 알아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보살펴주면 그 분노의 에너지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
간만에 비 내리는 아침. 찌뿌둥한 컨디션 덕분에 장판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책을 읽는데...
한 문장 한 문장 눈물이 나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의 분노를 대하는 자세는 그저 그 감정에 매몰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스스로에게 분노를 향한 감정에 대해 묻지 않았고 보듬어주지 않았다. 그저 그 존재를 알아주고 무조건적인 인사랑으로 보살펴주면 그뿐인데 말이다.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치유와 성장의 자리라고 인정하진 않았다. 고통의 자리에 있는 나를 다그치거나 자책하기 바빴다. 하지만 고통의 자리가 치유와 성장의 자리라고 생각하면 고통 앞에 있는 나 자신을 야단치거나 혹독하게 채찍질 해댈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연하고 넉넉한 사고를 하는 반면 스스로에게는 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나. 그 기준에 미치치 못하면 스스로를 다그치기 바빴다. 책을 읽으며 주눅 들어 있는 내 모습이 조명되어 눈물이 마구마구 흘러내린다. 나의 생각과 태도 때문에 자존감도 자신감도 바닥을 향한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나를 오늘은 위로하고 아껴주고 싶다.
고통의 자리에 있는 나에게 넉넉한 마음을 좀 가져줄래?
아프고 힘들면서도 더 열심히, 더 잘하라고 다그치기만 하는 조급함을 좀 내려놓아봐.
큰일 날 것 같아서 안달 나겠지만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늘만이라도 그래줄 수 있겠니?
다른 이들의 아픈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를 먼저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식에 그친 말뿐 행동에 옮기지 않았던 나를 다시금 돌아본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스로 축복의 통로 임대표로 포지셔닝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나의 소명이라 생각했고 덜 성숙한 내면의 내가 불쑥불쑥 올라올 때면 그 누구를 위함도 아닌 '예수 때문에' 감당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향한 선포이기도 하지 않은가. 모두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조명하고 있진 않겠지만 삶에 녹여내어 살아낸 만큼 서서히 선함이 흐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