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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Aug 03. 2023

이수명 시와 사물의 주체성

효구 비평


본 글은 계간 <시와사상> 2021년 겨울호에 수록된 평론입니다. 




1. ‘왜가리의 탄생이수명의 시와 사물

     


누군가 내 눈을 가져갔다. 나는 그 눈에서 뛰쳐나온 눈물이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 나는 내가 마셔댄 깊은 우물이었다. 나는 마시는 강이었다.

… (중략)


나는 들어간다 누군가의 꿈속으로. 그 속엔 황톳물이 흘러가고 말리지 못한 꽃들이 떠다니고 내 노래들이 휩쓸린다. 


그리고 다시

죽은채, 그의 꿈속에서, 나는 희미한 새벽이 되었다. 희미한 새벽으로 떠나갔다.


… (중략)


- 이수명, 「누군가」 中



   이수명의 시집을 만나기 위해서는 남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즉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혁신이 필요하다. 드르륵 회전축을 끌며 거대한 소음을 일으키는 문이 다른 세계를 열고 있다. 나는 쏟아지는 빛과 함께 서서히 드러나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이때부터 마음에서 그려진 이미지들이 허공에 작은 입자로 부유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먼지처럼 눈에 보이는 분명한 입자이기도 하고, 불빛 안으로 연약하게 사라지는 기류의 무리이기도 한다. 이처럼 형체 없이 물컹물컹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이수명의 시 「누군가」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나의 눈’과 ‘눈물’과 ‘우물’과 ‘강’의 실물감이 주는 생경함은 감각하는 자의 내면에 수많은 형상을 남긴다. 하지만 내면에서 만들어진 형상에서는 실제의 물성을 확인할 수 없다. 시적 형상은 시간이 갈수록 추상적으로 변모해가며 그 추상성이란 어떤 말과 그림과 소리, 몸짓으로도 완전히 표현해낼 수 없다. “사물 인식을 그대로 실현하는 언어는 사실상 부재”하다. 어쩌면 시의 형상은 시간이 지나면 나날이 무거워져 심해로 가라앉거나, 가벼워져 증발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일부 원생동물처럼 홀로 생식하여 자신과 비슷한 형체를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수명은 시적 터널을 통해 ‘사물’에 독자적인 주체성을 부여한다. ‘사물’은 누군가를 통해 의미나 상징으로 해석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난다. 이수명에 따르면 “우리는 그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 존재들은 우리가 압축할 수 없는 어떠한 저항의 에너지로 숨을 쉬고 있다.” 그리고 각기 주체성을 지닌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낯선 정황 속에서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의미가 희미한 촛불처럼 피어오른다. 내가 ‘눈에서 뛰쳐나온 눈물’이 될 때, ‘마시는 강’이 될 때, ‘누군가의 꿈속으로’ 들어갈 때, 그 안의 ‘황톳물이 흘러가고 말리지 못한 꽃들이 떠다닐 때’ 불현듯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운동성을 발휘해 발생해 나가는 것이다.

   말라르메는 시를 ‘위태로운 상태의 언어’라 했다. 텅 빈 백지 위에 흩뿌려지는 자유로운 시의 언어들은 여타 하면 그 조합과 그것이 위시하는 의미가 손쉽게 사라질 위기에 놓일 만큼 연약하다. 이수명은 이 유약한 ‘시’로서의 자신의 언어를 실현하게 하기 위해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철저히 고민해왔다. 그는 일찍이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을 표현할만한 언어의 형식을 찾고 있었다. 시인이 주목한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언제나 위태롭고, 사소한 속삭임에도 예민해져서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대상들, 인간의 시선 속에서 함부로 흩어지는 사물들이었다. 시인은 그 흐릿하고 이상한 존재와 형상의 순간들을 포착하기 위하여, 포착하기 힘든 장면을 일상에서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거리에 나간다. 시인은 그가 홀로 배회하던 거리에서 목격한 모든 정황 안으로 자신을 이입시킨다. 그러나 이수명의 관심은 이입된 자신에게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대상들과의 묘한 ‘교류’에 있다. 그는 대상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일으키는, 변화하면서 주변의 에너지를 움직이는 인식의 세계를 발견한다. 시인이 내려놓은 사물은 뒤집어지고 비틀어지며 연기를 내뿜고 파괴된다. 사물은 간데없어진다. 사방이 뒤집어지고 비틀어지며 세계는 분열한다. 이 시도는 과감한 유희 같기도, 구태의연한 인식론에 대한 대단한 오기 같기도 하다. 

   1998년 세계사를 통해 출간된 이후 문학과 지성사에서 일부 시를 엄선하여 세상에 다시 선보였던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이수명이 이후 펼쳐나갈 새로운 시적 탐구와 시선에 대한 가능성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그의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 이수명식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탐구 의식의 시작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그 맥을 달리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등단 시집보다 분명 조금 더 도전적이고 과감해진 시인의 의지를 보여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색다른 발상 전환의 장을 그렸음이 분명하다. 

   본 평론에서는 이수명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에서 드러나는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기반으로 일으켜진 시적 대상이 구축해나가는 서사의 확장성을 알아본다, 즉, 이수명의 시 언어로 실현되는 시적 대상의 지속적인 확장 이미지와 서사를 읽어본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확장되어가는 이수명의 시 속 사물이 움직이는 원리는 시인의 대상을 ‘인식’하는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수명은 대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신뢰한다. 인간이 아닌 사물 자체에 초점을 두는 방식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이수명 시의 사례를 통해 ‘사물’이 지니는 주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본다. 이것은 시 창작을 위한 새로운 탐구와 실험의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성숙한 인식 주체’로 도약할만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 시단에, 그리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유의미한 전환의 장이 된다.



2. ‘왜가리라는 명명새로운 인식의 실현



   예술 작품을 둘러싼 주체는 둘로 나뉜다. 한쪽은 창작자이고, 다른 한쪽은 평자이다. 문학 작품으로만 볼 때, 창작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만이 가지고 있었던 고유한 이미지나 서사를 구현한다. 반대로 평자는 그것을 읽고 즐기며 평한다. 평자가 창작자와 같은 점이 있다면, 평자 또한 창작자가 창조한 고유한 장면을 독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해나간다는 점이다. 즉, 같은 작품을 두고 지은 이와 읽는 이가 전혀 다른 ‘인식’을 한다. 이것은 각자의 크고 작은 생활의 경험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창작자와 평자가 한 개의 문학적 장면을 떠올릴 때 그 상상의 범위는 각자의 우연하고도 개별적인 경험의 폭 안에서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 

   가령 이수명의 두 번째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의 표제작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읽어보자. 



왜가리는 줄넘기다.

왜가리는 구덩이다.

왜가리는 목구멍이다. 

왜가리는 납치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테이블은 하나다.

테이블은 둘이다. 

테이블은 셋이다. 

테이블은 숲 속에 놓여 있다. 


손을 들고

숲이 출발한다.

테이블은 없다. 


테이블 위로 왜가리는 도착한다.

걸어다니는 테이블 위로 왜가리는 뛰어든다.


테이블은 부서진다.

숲이 출발한다.


왜가리는 하나다.

왜가리는 둘이다.

왜가리는 셋이다.

왜가리는 없다.


왜가리는 숲 속에서 왜가리놀이를 한다.


- 이수명,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읽는 사람은 ‘왜가리’라는 ‘왜가릿과에 속하는 전장 93㎝의 대형조류’의 모습을 연상하며 그 구체적인 생김새를 생각해볼 것이다. 더불어 각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관련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논두렁을 걷다가 자주 발견했던 왜가리든, ‘동물의 세계’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 학습한 왜가리든 각자의 경험의 틀 안에서 기억하는 ‘왜가리’의 물리적 외관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그 경험 안에서 사람들이 감각했던 특수한 정황은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에게 ‘왜가리’는 그리운 고향을 상기시키기도 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속 인상 깊은 장면의 대상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이 시의 1연에서 왜가리는 ‘줄넘기’, ‘구덩이’, ‘목구멍’, ‘납치’와 동일하게 은유 된다. 어쩐지 장난스러운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가령, ‘줄넘기’를 넘던 왜가리가 ‘구덩이’에 빠진다. 왜가리는 그 기다란 ‘목구멍’이 다 드러날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고 운다. ‘구덩이’는 누군가 왜가리를 ‘납치’하려 했던 함정이다. 각자의 자유로운 연상 속에서 ‘왜가리 놀이’의 시 읽기가 구조적으로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2연에서는 ‘왜가리가 왜가리 놀이를 한다’고 하므로 앞선 유희적인 시 읽기는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돌연 ‘숲’에 있다고 하는 ‘테이블’이 등장한다. 아직 ‘왜가리’와 ‘테이블’은 각자의 독립성을 구현하며 각자의 자리에 놓여있다. 그리고 4연부터는 사물의 이동이 시작된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각 객체의 과감한 이동의 결과로 대상들은 격하게 접촉(‘걸어다니는 테이블 위로 왜가리는 뛰어든다’)하고 반응(‘테이블은 부서진다./숲이 출발한다.’)한다. 이 모든 왕성한 움직임에 대해 시인은 마치 이것이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수명이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시집의 표제로 내세운 것은 의미심장하다. 마치 그는 자기 시집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의 전위를 예고하는 듯하며 그 도전적인 실험을 선언하는 것 같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박상수가 시집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그의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이후 두 번째 시집인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첫 시집과의 완전한 단절”을 이루면서 그가 “탐구해나갈 시 세계의 밑그림을 제대로 펼쳐 보인 사실상의 첫 시집”이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를 읽었을 때 그 해석이 개별적 상상의 좁은 영역 안에서 보편적인 사고로 이끌어질 것을 기대하던 독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독자는 시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연상을 넓혀나갈 기회를 얻는다. 즉, 독자는 왜가리의 외관(하얗고 기다란 부리)이나 직간접적인 경험(가령 ‘고향’과 관련된 무엇을 떠올림)에서 도출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시적 장면을 기대하게 되지만, 이수명식 ‘왜가리’를 통해 독자는 ‘숲’에서 ‘테이블’을 만나고 ‘테이블’과 ‘왜가리’가 교차하는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일상의 논리를 깨고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만나는 도약적인 경험이다. 그가 ‘왜가리는 줄넘기 놀이를 한다’라고 말할 때, ‘왜가리’라는 대상은 새로운 역할을 지시받고 다른 정체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으며 읽는 이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수명이 선택한 대상은 각자의 영역 안에서 고유하게 정체하다가 움직임을 개시한다. 시속 사물들은 움직이기 전 정지 상태에서 보편적 의미로 갇혀 있다가 운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제한된 사고 영역을 파괴한다. 이수명은 사물의 명명이 주는 억압의 틀을 계속해서 깨부순다. 그는 사물을 통념과 다르게 발생시키고 확장하면서 의미를 끊임없이 창조한다. 그 확장은 다양한 차원으로 지속하는데 여기서 ‘확장’과 ‘지속’은 비단 공간적인 넓이의 팽창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상은 크게 부풀어 팽창해나가다가 끝끝내 폭발하고 소멸하면서 완곡한 진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개체로 변모하기도, 전혀 다른 대상과 만남을 직면하기도, 때로는 그 만남을 유보하기도 하며, 또 다른 제3의 개체의 역할을 제안받기도 한다. 이 ‘영원한 발생의 현장’에서 다양한 사물들의 움직임과 만남은 무한한 지평의 가능성을 열어나간다. 이것은 ‘왜가리’라는 시적 대상을 신뢰하는 시인의 태도, 그 자체로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시인의 시적 인식론에 기반하고 있다. 



3. 사물의 주체성



   고흐가 그렸던 수많은 구두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것을 신는 자를 떠올려보게 된다. 급히 벗어내려고 했었던 것인지 끈이 구불구불 아무렇게나 풀려져 있고, 낡은 밑창은 다 헐어서 떨어져 나가려고 한다. 신는 자에게 그 구두는 귀한 물건이 아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는 온종일 자신의 발을 옥죄던 그것을 서둘러 벗어던지고 지친 몸을 침실로 누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독 투박해 보이는 구두의 외양은 바빴던 누군가의 노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를 좋아했다. 그에게 고흐의 구두는 예술 작품으로의 단순한 대상을 넘어서서 대상의 존재적 의미와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설명한다. 구두는 단순히 검은 가죽으로 가공되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자와 앞으로 사용할 자의 생활까지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또한 그것을 목격하고 사유한 제삼자에게는 삶의 이해를 돕는 하나의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사소한 정물을 통한 철학적 발견을 시도했다는 면에서 하이데거와 이수명의 사유 방식은 일치한다. 고흐의 작품 『구두』를 보고 존재 물음을 떠올렸던 하이데거처럼, 이수명은 자신의 시 속 사물들을 꾸준히 관찰했다. 그는 그것을 그저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대상으로 인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수명의 시 속 사물들은 주체성을 부여받아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아래의 시 「양파」에서는 시인이 ‘양파’라는 대상을 탐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전위적인 시 쓰기를 실험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는 듯하다. 



양파를 깐다. 


흰 식탁보 위에서 한 손이 다른 손을 닮는다. 


벽돌이 올라가는 소리 벽돌이 날아다니는 소리 벽돌이 달라붙는 소리


아침에 노새 한 마리를 보았다. 놓여 있기를 바닥에 덩그러니 노새가 고여 있기를 사용하기 전에 노새가 온통 부서지기를


긴 호스를 끌고 다니며 물을 쏟았다.


내 손에서 갈라지며 나는 눈 먼 가장 가벼운 양파 껍질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나의 양파들은 불탄다.

나의 양파들은 튀어 오른다. 

… (중략)


엎질러진 양파 위로 떨어지는 빛이 양파 속으로 들어가 그 어둠을 밖으로 내밀 때 … (중략)


천 개의 흰 식탁보들이 일제히 춤을 춘다.


나아가고 나아갈수록 나는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어둠이 와서 아침과 부딪칠 때 어둠은 나아가지 않았다. 


- 이수명, 「양파」 中



   시 「양파」는 ‘양파’와 ‘양파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화자’, ‘흰 식탁보’, ‘손’, ‘빛’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에서 주 대상인 ‘양파’는 의외로 수동적인 편이다. 그것은 화자에 의해 벗겨져서 ‘가벼운 껍질’이 되고 ‘긴 호스’에 의해 물 뿌려지며 결국에는 ‘불타’며 ‘튀어 오르는’ 존재이다. 차라리 시 전반에서 실질적인 주체인 것으로 보이는 대상은 ‘양파’라기 보다는 ‘빛’과 ‘어둠’이다. ‘빛’은 ‘양파 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밖으로 내민’다. ‘어둠’은 ‘빛’의 자식과도 같은 ‘아침’에 부딪치면서도 ‘나아가지 않’는다. 한편 썩 어울리지 않아 보임에도 또 다른 주체로 갑작스레 등장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벽돌’과 ‘노새’이다. ‘벽돌’은 ‘올라가’고 ‘날아다니’며 ‘달라붙’는다. 그리고 화자는 그 소리에 주목한다. 화자는 ‘노새’가 ‘놓여 있기를 바닥에 덩그러니 고여 있기를’, 심지어는 ‘온통 부서지기를’ 간청하는 것 같다. 

   이처럼 시인은 ‘양파’를 말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사물을 불러들인다. 통상 사람의 손에 양파가 까지는 것이 이치이고, 물이 아닌 불에 의해 양파가 요리되는 것이 상식이거늘 이 시 속에서는 양파를 까는 행위는 안중에 없고 그것을 둘러싼 사물들의 입장에 집중한다. 선택된 사물은 서로 인접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터무니없이 무작위로 선별되어 우연히 만난 대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 「양파」 외에도 이수명의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중에는 「은사시 나무」, 「사과나무」, 「사과 폭격」, 「풀은 무엇으로 태양을 녹이는가」, 「채소밭에서」, 「사라지는 숲」, 「나무 타기」, 「가을을 던지는 나무」와 같이 ‘나무’, ‘풀’, ‘채소’의 ‘식물’을 소재로 하는 시편들이 등장한다. 초록의 유유한 자연 속 서정적 배경을 연상케 하는 이 소재들을 담고 있는 시편들에서도 역시나 식물의 대상들은 기존 ‘식물’으로서의 상식에서 벗어나 활발한 역할을 도맡아 움직이고, 이것은 읽는 이에게 통념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허락한다.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다. 몸속에 사과가 쌓인다. 사과가 나를 가득 차지하면 비로소 사과는 숨진다. 사과가 숨질 때 나는 사과나무를 본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때로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먹은 사과들이 내게서 탈주하는 것이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 이수명, 「사과나무」



사과를 놓친다. 사과를 놓치고 넌 나부낀다. 사과가 마차를 타고 울타리를 넘을 때 넌 넘어지는 울타리로 나부낀다. 


사과는 씨를 뱉는다. 나무에 매달린 씨를 뱉고 덫에 걸려든 씨를 뱉고 테이블 위를 날아다니다가 테이블을 뒤엎는다. 


사과는 밖이다. 사과가 사과를 나열하고 사과는 사과를 방류한다. 사과가 내미는 동그란 혀는 이미 목구멍이 부서진 세계의 상형문자가 아니다. 


사과는 자신의 색으로만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온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숲이여, 지금 사과들이 너의 머리 위를 폭격하고 있다. 


- 이수명, 「사과 폭격」



   ‘사과’를 소재로 하는 위 두 편의 시 중, 「사과나무」는 2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작품으로, 1. 화자는 ‘사과를 먹’고, 2. 그가 먹었던 ‘사과나무는 아름답다’라는 단순한 감상으로 종료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출한 플롯에서 ‘사과나무의 아름다움’이라는 서정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이수명의 시작법은 남다르다. 화자는 ‘사과를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몸속에 사과가 쌓인다’. 이후 시인은 슬프게도 ‘사과는 숨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2연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라져서 ‘숨졌’던 사과가 부활하기 때문이다. 1연에서 화자가 먹어서 그의 몸에 쌓였던, 누군가에게 양식과 거름이 되었음에도 스스로 ‘숨졌던’ 사과가 이제는 화자로부터 ‘탈주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은 시인은 의도적으로 화자가 아닌 ‘사과’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주한 ‘사과’는 자신의 탄생과 출신을 은유하는 ‘사과나무를 불태’우고 만다. 종국에는 불에 타지만 ‘아름다운 사과’로 귀결되면서 약간의 비극미를 이끌어내는 이 이야기의 묘한 감수성은 화자가 평범하게 삼킨 ‘사과’가 도모한 계획, 즉 ‘스스로’를 돌연 ‘죽이고’, ‘불태워버’린 과감한 시도를 통해 극대화된다. 

   한편, 「사과 폭격」에서도 앞선 「사과나무」에서처럼 ‘사과’라는 대상이 스스로 움직인다. 사과는 ‘씨를 뱉’고, 자신을 ‘나열하고’, ‘방류한다’. 사과로 ‘나부끼고’, ‘뒤엎어지며’, 그 본연의 ‘색으로만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오는’ 이 거친 이미지들의 만연은 어지러운 ‘숲속의 사과 폭격’으로 도출되기에 충분하다. 

   화자가 아니라 ‘사과’ 자신이 자신을 죽이고, 날아다니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장면은 이수명의 끈질긴 사물 탐구와 정제된 시적 사유에서 결정되었다. 이처럼 이수명은 사물에 자유로운 결정권을 부여한다. 이것은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장면을 한 렌즈로 투사하지 않고, 다각도에서 복수의 카메라가 촬영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로, 독자에게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서 특수한 모티프를 경험할 기회가 된다.  



말라르메는 개념적인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 존재, 무를 가장 단순한 사물들에 각인시켜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친숙한 것에 근원적인 불가사의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시가 탄생한다. 비록 낯선 영역으로 빠져든다 할지라도 영혼이 그 앞에서 전율하게 되는 말과 형상에 의한 비밀의 노래.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의 구조』,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05쪽.



   시에 사용하는 소재를 보편적인 의미로 구속하지 않는 방식의 시적 방법론은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 그것의 상징성을 무한히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말라르메가 시적 소재로 사용했던 단순한 사물들이 보편적이지 않은 표상을 드러내며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낼 때, 이 비밀스러운 시의 언어는 독자에게 도달한 적 없는 탁월한 세계의 경험을 선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구두’라는 대상을 통해 진리를 목격하고, 이수명이 ‘사과’를 먹고 죽이고 불태운 이후 ‘사과나무는 아름답다’는 시적 결론에 도달한 사례와 동일한 연장선에 있다. 

   이수명은 사물이 지니는 고유한 물성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물성 그대로의 사물을 고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내버려 둔다. 시인의 손에서 자유롭게 놓인 사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존감을 획득한 ‘주체’처럼 진취적으로 움직인다. 이수명의 시적 대상들은 시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스스로 출현한다.” 그는 시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비한 동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시인이 이끌 수 없고 “시 스스로 운신해나가는, 모종의 자명함”이다. 



4. ‘왜가리’ 식 탐구와 실험한국 시의 전위와 실천을 위한 메시지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속 물고기였을 때

무엇이 나를 데려다놓았는지 몰랐다.

… (중략)


… (중략)

바다는 나를 물고기라 불렀다. 

물고기가 널리 퍼졌다. 거품으로

거품은 다시 바다로 

퍼져갔다. 

검은 수초가 떠다녔다.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속 물고기 되어

바다와 만나려 하였을 때

나는 눈을 뜬 채 바다 위로

바다를 벗고 떠올랐다. 


- 이수명,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 中



   시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에서 시인은 ‘깊은 바닷속 물고기’가 된다. 사람인 내가 돌연 ‘물고기’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독자는 새로운 인식을 요청받는다. 새로운 인식으로의 시도 중에 주체는 ‘무엇이 자신을 데려다 놓는지 알 수 없다.’ ‘물고기’의 인식 안에서 바다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세계이면서도 알 수 없는 미지이다. 그 안에서 바다에 의해 주체는 ‘물고기’로 ‘지칭’된다. 시인은 ‘물고기’의 입장에서 자신을 스스로 움직여 본다. 그는 새로운 인식 안에서 ‘퍼져’본다. ‘검은 수초’를 만나고 ‘눈을 뜬 채’ ‘바다를 벗고 떠올라’본다. 이수명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사물의 미지에 눈뜨기 위해, 시인은 시인을 벗어나 ‘물고기’를 주목하고, ‘물고기’의 움직임을 뒤쫓고, ‘물고기’에 의해 사라진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하나의 명제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정형화된 방법론으로 집요하게 답안을 구하지 않는다. 시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에서 ‘물고기’라는 이상(理想) 또는 예술이 추구하는 하나의 미(美)적 대상을 향해 시인은 다가가되, 접촉하지 않는다. 즉, 그는 대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지만, 근처에서 배회하고 머무를 뿐 정확히 대상과 합일(合一)을 이루지 못한다. 시인은 절대적 이상(理想)에 맞닿는 순간, 그것이 파국이고 죽음임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예술에 온전히 통(通 )하지 않고 그 곁에서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은 시인의 소임이다. 이상(理想)에 다가갈수록 주체는 파괴되어 간다. 이상(理想)에 도달한 대상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소멸시킨다. 하지만 시인은 대상의 곁에 밀착하지는 못할지언정 대상에서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 곁에서 거리를 지키며 소명을 다하는 시인의 생(生)이야말로 고귀한 세계의 유물이라 할 수 있을까.

   현대에 이르러 시는 정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등의 전통과 결별하고 광범위한 의미의 소위 모더니즘으로 지칭되는 현대성의 시인들에 의해 ‘불협화와 비규범성’은 보편화 된다. 이에 따라 현실은 공간적·시간적·객관적·정신적 질서로부터 풀려나오며 정상적 세계관에서의 필수적 구분들, 즉 미와 추, 가까움과 멈, 빛과 그림자, 고통과 기쁨, 지상과 천상 등의 선입견처럼 기정사실화된 구분들로부터 벗어난다. 이수명의 시는 이러한 서양 현대 시 사조와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시인은 자신의 창작품에 “그 자체로는 빈약한 의미밖에 갖지 않는 임의적인 소재를 시험하는 시적인 지성으로서, 언어의 조작자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관여한다.

   대상에 주체를 부여하는 전위적인 탐구와 실험의 결과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물론 이수명은 ‘선입견이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시단을 향한 진취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를 창작하지 않는다. 창작자 이수명에게 시를 쓰는 일은 “완벽한 휴식”일 뿐이다. 그는 “시를 쓸 때 특별히 시간이나 공간을 의식하지 않으며, 이미지를 그려 보는 것,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다만 이수명이 자신의 시론집에서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대상을 향한 무한하고 지속적인 인식의 개편’이다. 시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들이는 수고나 그에 따른 피로는 성숙한 시적 주체로서 지불해야 할 “통찰의 과정”이란 비용이다. 이 혁신의 과정에서 독자는 “현존재를 발견한다.” 그리고 “아직 관념화되지 않은 존재론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본다.” 이 발견은 ‘성숙한 인식 주체’로의 계속적인 진보를 꿈꾸게 한다.

   이수명은 우연히 접하게 된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탐구한다. 시인은 사물에 애정을 가지고 몰입한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바라보듯 그것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즉 그는 사물에 주체성을 부여한다. 대상은 돌연 스스로 움직인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상은 끊임없이 발생하며 발생은 무한하다. 이러한 시적 탐구는 존재의 깊이를 알고자 하는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았으며 성찰의 가능성을 여는 의지를 드러내며 도전적인 시적 실험을 감행하게 했고 시단에서는 한국 시의 전위를 실천한 결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이수명 시의 전위적 특성은 그것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그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은 서서히 허락하게 된다. 새로운 이치와 변화를 이해하려고 하며 나름의 논리에 감화된다. 전도된 대상의 위치와 그들이 형상화된 장소로 가서 우리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세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참신한 사유를 경험한다. 그것은 고여 있고 정체된 소속감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궁극적으로는 성숙한 인식으로의 도약이다. 




참고 문헌


이수명, 『물류창고』, 문학과지성사, 2019.

이수명, 『횡단』, 민음사, 2019.

이수명,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15.

이수명, 『표면의 시학』, 난다, 2018.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의 구조』,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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