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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Oct 13. 2024

「여성을 향한 가장 원시적인 접근」 - 한강론

『내 여자의 열매』 · 『채식주의자』 · 『몽고반점』 · 『나무 불꽃』




1. 여성을 향한 접근


그녀의 틈새.
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너의, 너 자신의 냄새.



정이현의 단편소설 『무궁화』에서는 여성의 성기와 그 냄새를 ‘꽃잎에 번성하는 진딧물의 냄새’이자 ‘태초와 세상의 모든 냄새’로 비유한다. 두 여성의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과정을 여성의 몸의 변화에 빗대어 그려낸 이 작품에서 지린내가 나는 벌레 먹은 꽃, ‘무궁화’나, ‘뭉클한 핏덩어리들’로 드러나는 선홍빛 ‘장미’ 송이들은 모두 여성의 몸에 대한 문학적 은유 대상이다. 


이처럼 예술 작품 안에서 여성은 자주 ‘식물’로 비유된다. 식물은 무능하다. 동물에 비해 1차원적인 단순한 생장조직으로 이루어진 몸체는 스스로 이동할 능력조차 없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 심어지고 길러지지 않는 이상 식물은 갱생할 수 없을 만큼 수동적이다. 하지만 식물은 신비로운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시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식물이 제 자리에 우직하게 뿌리를 내린 채 꿋꿋이 자신의 생을 이어나가는 충실한 모습을 경외한다. 부드럽고 정적이며 신비로운 여성의 모습은 ‘식물’과 같이 자연의 가장 원시적인 태고(太古)의 출발, 즉 지구 생명의 가장 첫 번째 발생의 모습을 닮았다. 


아랫도리로부터 생리혈이 왈칵왈칵 게워져 나오고 있다. 실내복 원피스를 배꼽까지 걷어 올리고 한 손을 팬티 속으로 집어넣는다. 생리대와 맨살 사이에 펼쳐진 네 손바닥, 그 위로 뭉클한 핏덩어리들이 쏟아져내린다. 따뜻하다. 꿈속에서 너는 창문 너머 펼쳐진 수만 송이 장미들을 보았다. 바람결에 하르르 몸을 떠는 선홍빛 꽃 이파리들.

그녀의 머리칼은 짐승의 갈기처럼 흐트러졌고, 시트는 구겨진 채 그녀의 하체를 휘감고 있었다. 맵고 시큰한 냄새, 달콤하면서도 역하고 씁쓸한 냄새에 섞여,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배냇내 같은 그녀의 체취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문학 작품 안에서 여성의 몸은 ‘식물’이나 ‘아이’처럼 덜 발달되고 진보하지 않은 상태의, 가장 ‘본래적’이며 ‘태초’의 것을 닮은 대상으로 나타난다. 정이현의 작품 『무궁화』에서는 임신이 되지 않은 자궁의 벽이 무너져 흐르는 월경혈을 ‘수만 송이 선홍빛 장미꽃 이파리들’로 그리고 있다. 또한 한강의 『몽고반점』에서는 여자 주인공의 체취를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배냇내’로, 그의 시선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단단한 근육이나 노동의 결과로 흘린 땀 냄새가 아닌 ‘아기의 배냇내’로, 안경이나 망원경을 낀 예리한 눈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설명했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여성의 육체가 문학 안에서 표현되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여성의 몸은 ‘자궁’처럼 가장 태곳적의 어두컴컴하고 부드러운 기억과 맞닿아 드러나고 있다. 


여성을 가장 원시적인 생명으로 비유함으로써 문학 작품은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걸까. 꿈처럼 아련하고 환상적이며 신비롭게 그려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해방감을 얻게 되는가. 그것이 해방감이라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서 현실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라면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2007년도에 초판 발행 이후 2020년에 90쇄를 찍었다. 이 작품이 화제가 된 것은 2016년 맨부커인터네셔널 수상 이후였는데, 아시아 최초의 수상이었던 점, 영미권에서 맨부커상이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당시 여러모로 유의미한 기록이었다. 이 장편 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단편을 묶은 연작으로, 작가 한강은 작품 말미에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제자리에 차례를 맞추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길었던 매듭이 지어지는 느낌이다.”라고 소회했다.


본 평론에서는 페미니즘적 작품으로서 작가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속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다프네와 피그말리온 신화에 접목시켜 확인해보고자 한다. 사회에서 억압하고 금기해왔던 것들에 대해서 한강의 작품 속 여자 주인공은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같은 작품 안에서 남성 주인공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결론에서는 신화에 접목한 한강의 작품 속 여성과 남성 인물의 특징을 통해서 확인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돌이킨다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그리움

현대에 만연한 것들을 초월하는 본연의 마음그 시작점을 회상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이는 폭력과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를 향한 반성과 성찰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2. 


1) 식물로 드러나는 여성성 – 다프네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태양의 신 아폴론이 사랑한 여인 다프네에 대한 일화가 있다. 다프네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이자, 아폴론이 사랑하는 님프였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고 사랑의 열병에 빠진 아폴론은 다프네를 뒤쫓기 시작하지만, 다프네는 그의 사랑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어버리고 만다. 다프네가 변해버린 나무는 

월계수인데 그가 변해버린 뒤에도 여전히 나무에 아름다움이 묻어있었으며이후 아폴론은 왕관 대신에 월계수 잎사귀로 만든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고 한다.


저항적인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다프네 신화는 불편하다. ‘처녀’ 또는 ‘젊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다프네가 냉철한 이성의 ‘남성’ 신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함에도, 결론적으로 다프네의 의지는 저버려진다. 다프네는 원치 않는 사랑을 피하려고 아폴론으로부터 달아나지만 결국 저항하지 못한 채 식물로 전락한다. 다프네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로 변하는 것도, 노루나 토끼와 같은 초식 동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무능하게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로 변한다. 아무리 아폴론이 월계수에 남아있는 다프네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월계관을 제 몸에 지니고 싶어했다 해도, 다프네의 의지가 반영되었더라면 다른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월계관이 돌연 공기 중으로 증발해버린다거나, 아폴론에게 모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월계수 스스로 독을 품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아폴론이 싫어 자신을 지키려던 다프네는 결국 아폴론의 몸에 지니는 장신구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여성의 수동성을 일반화하는 결말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하지만 다프네가 변해버린 대상이 나무, 즉 ‘식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나무로 변해버린 다프네의 아버지가 강의 신인 것처럼 모든 생명은 물을 통해 탄생한다. 식물은 우주의 원천인 태양과 물이 만들어 낸 생명체의 가장 미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예로부터 신화 속에서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인간들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모체에 수정된 태아를 품어 기르고 제 몸을 통해 출산하는 생물학적 여성의 모습을 예술 작품 안에서 ‘식물’과 연결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한강의 작품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에서 여자 주인공은 ‘식물’로 일치된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온몸에 푸른 멍이 돋아나던 여자 주인공의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열매를 쏟아낸다. 『채식주의자』 연작에서도 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나무라고 여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식물의 정체로 받아들인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세상의 억압이나 폭력에 환멸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떠나서 피를 갈고 싶어, 라고 아내는 말했었다. 줄곧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사직서를 마침내 직속상사에게 올렸다던 날 저녁이었다.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를 갈아내고 싶다고, 자유로운 공기로 낡은 폐를 씻고 싶다고 아내는 말했다.


깊은 밤과 새벽이면 한산한 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는 택시며 오토바이들의 굉음에 아내는 깜짝깜짝 깨어 몸을 떨곤 했다. 차들이 아니라 도로가 달리고 있는 것 같다고, 도로와 함께 이 집도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고 아내는 말했다. 굉음이 멀리 사라진 뒤에야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드는 아내의 귀염성 있는 얼굴은 산 사람 같지 않게 창백했다.
저것들, 다 어디서 왔을까. 
그러던 어느 날인가, 들릴 듯 말 듯한 쉰 목소리로 아내는 꿈결처럼 물은 적이 있다.
……다들 어디로 저렇게 달려가는 거야?


『내 여자의 열매』에서 ‘박봉의 출판사를 개근’해왔던 아내는 도시적 문명을 상징하는 ‘아파트’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밤만 되면 들려오는 차들의 굉음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는 계속해서 지금 그들이 속한 도시적인 삶에서 벗어나기를 호소한다. 그리고 결말 부에 이르러서 초록의 식물로 변해 ‘열매’를 낳게 되는데, 남편이 베란다에 심은 ‘열매’가 돌아오는 봄에 새로 피어나게 될지, 겨울 추위 속 죽고 말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여성 주인공이 황망히 굳어서 잎사귀로 뒤덮힌 채 풀 냄새를 내뿜고, 그마저도 겨울이 되어 다 떨어뜨리고 한 움쿰 열매를 우수수 내뱉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읽는 이 스스로 답을 궁리하게 된다. 그는 다시 꽃으로 피어날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식물’이 됨으로써 아내는 ‘폭력’으로 상징되는 사회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에서 어려서부터 폭력에 노출되었던 주인공 영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그는 나무가 됨으로써 폭력적인 삶과의 소통을 단절하고자 했다. 그리고 완전한 나무의 삶이 죽음일지언정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단절을 원하는 것은 주인공 영혜뿐만이 아니다. 영혜와 달리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애써왔던 언니 인혜는 버텨왔던 삶에 대해 비로소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그는 영혜를 이해한다. 인혜는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직면하며 복잡한 삶의 기로에서 영혜가 느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을 직시하고 인정하게 된다. 


아폴론에게 쫓기다가 나무로 변한 다프네나 식물이 되어 열매를 낳은 아내, 스스로 나무가 되었다고 믿는 주인공 영혜 모두 남성성이나 세계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것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식물’로 결정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한강의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이 다프네 신화와 『내 여자의 열매』 속 아내와 다른 점은 자신이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 주인공 영혜의 ‘의지’에서 드러난다. 다프네와 아내가 어쩔 수 없이 나무로 변한다면, 영혜는 마치 자신이 나무가 되기를, 움직이지 않는 식물이 되어 영원히 정지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2) 페미니즘 문학 작품 속 피그말리온


한편 페미니즘 문학작품, 특히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안에서 남성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다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가서 피그말리온이라는 청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피그말리온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고 하는 바닷가 옆에 위치한 키프로스섬에 살던 뛰어난 예술가이다. 그는 그 섬에서 매춘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성들을 혐오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정성을 다해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의 간청으로 아프로디테는 조각된 여인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피그말리온은 여인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결혼 후 딸 파포스를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다프네 신화와 같이 피그말리온의 신화 또한 남성 예술가가 여성을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아닌 단순한 예술 작품으로 대상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피그말리온이 오로지 자신의 미적인 이상향을 고집하는 모습은 『몽고반점』의 화자인 영혜의 형부와 닮았다. 


그가 찾았던 것은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는 오랜 공백기를 깨고 만들어낼 자신의 예술적 이미지에 사로잡혀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치 태양과 음악, 예술의 신 아폴론이 다프네에게 반하는 것처럼 그는 영혜에게로부터 아주 기이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부합하는 영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정작 좋은 아내인 인혜와 아들에게 형편없는 남편이다.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전부인 피그말리온처럼 그는 자신의 이상향에 미친 듯이 매달린 나머지 결말에 이르러 처제와 불온한 관계를 맺어 가족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즉 『몽고반점』 안에서 피그말리온 신화는 가족 안에서 실패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재해석된다.


그 꿈을 꾸기 전날 아침 난 얼어붙은 고기를 썰고 있었지. 당신이 화를 내며 재촉했어.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빨리, 더 빨리. 칼을 쥔 손이 바빠서 목덜미가 뜨거워졌어. 갑자기 도마가 앞으로 밀렸어. 손가락을 벤 것, 식칼의 이가 나간 건 그 찰나야.
두 번째로 집은 불고기를 우물거리다가 당신은 입에 든 걸 뱉어냈지. 반짝이는 걸 골라 들고 고함을 질렀지.
뭐야, 이건! 칼조각 아냐!
일그러진 얼굴로 날뛰는 당신을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어.
그냥 삼켰으면 어쩔 뻔했어! 죽을 뻔했잖아!


한편 『채식주의자』에서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이 화자가 되어 관찰자 시점에서 영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바라본다. 작품 안에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평범한 것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는 아내가 자신의 삶에서 그를 위한 ‘안락’ 자체이기만을 소망한다. 애초에 영혜가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요리에서 칼날이 나왔던 사건 이후에서부터였음에도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안일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일상에서 영혜를 향해 휘두르던 폭력성에 대해 인지하지도,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지도 못한다. 


‘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남편과 달리 (두 손에 받은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은 것 제외하고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편이 화자로 등장한다. 『채식주의자』와 달리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남편의 외로운 감정에 주목한다. 여기서 남편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늘 지치고 피로하여 외로웠음을 아내에게 고백하며 아내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종국에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남성의 분노를 현대 문명의 어두운 국면으로 이해하며 설득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작가가 『내 여자의 열매』 이후 『채식주의자』로 작품을 변주하면서 조금 더 저항적인 여성성을 그려낼 수 있는 소설적 장치-영혜 남편의 폭력적이고 안일한 인물됨-를 의도적으로 추가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3. 



앞서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속 여성과 남성 주인공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그리스 신화와 연결 지어 읽고 생각해보았다. 아폴론에게 쫓기다가 나무가 되어버린 다프네 신화에서처럼 한강의 작품에서는 여자 주인공들이 식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 연작이 다프네 신화와 다른 점은 여자 주인공 영혜가 주체적으로 식물이 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육식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도시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다. 한편 자신이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이 실제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하게 되어 결혼한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채식주의자』 연작 중 영혜의 형부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영혜의 형부가 소설 안에서 실패한 인물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한강의 작품 안에서 피그말리온은 비판받을 만한 신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소설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주인공이 ‘푸른 잎을 가진 식물’로 변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환상적인 소설

로 설정하고 처리한 결과이다. 반면에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 속 주인공은 소설적 설정 면에서 조금 다른 양상이다이 연작에서는 환상이 현실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따라서 자신을 식물이라 굳건히 믿고 있는 주인공 영혜는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소설 구조 안에서 명백히 병자로 간주된다즉 여기서 주인공 영혜는 현실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가장 은밀하고 본능적인 인간의 일면을 바깥으로 노출하는 인물이기에 작품 안에서 내내 핍박받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병자로서의 영혜를 이해하는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의 목표일 뿐 아니라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가 해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영혜는 왜 자신을 식물이라고 믿는 걸까. 그는 왜 육식과 폭력으로 상징되는 도시적 삶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할까.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육식’을 거부하고 소위 교양 있는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매너-브래지어를 하고 구두를 신고 치마를 입는다-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 한강의 네 작품은 여러모로 많은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사회가 지금껏 어떤 방식으로 육식을 허락하고 유통해왔는지, 여성이 지켜야하는 프레임은 어떤 사고방식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공고하게 형성해 놓은 제도와 체제는 공동체 생활을 윤활하게 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견고한 조직을 형성하게 되는데 조직의 사상과 법체계가 훌륭할수록 그것은 진보적인 사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가 공고해질수록 인간은 소외되는 국면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기득권은 소외 계층을 충분히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오래도록 자신의 기반을 지켜왔던 자본이나 지배 권력의 힘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분명 우리는 기성이 요구하는 약속의 범위 안으로 스스로를 욱여넣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해보아야 한다.


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도시민들은 각자의 노동과 생활 안에서 잊을 수밖에 없었던 유년과 사랑에 대한 기억을,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모성’의 느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강의 소설 안에서 식물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여성성은 억압된 현대 시민들에게 간절한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 가장 원시적인 생명의 모습은 현대 시민들에게 환상처럼 아득하고 멀기는 하지만 영원히 붙들고 싶은 마음속 최후의 보루가 아닐지. 




※ 참고 문헌


단행본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19.

한강, 『채식주의자』, 창작과비평, 2020.

한강,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중 「내 여자의 열매」,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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