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구 비평
본 글은 반연간 <시인들> 2025년 가을호(7호)에 수록 예정인 계간평입니다.
지난 반연간 『시인들』 5호와 6호에 수록된 시편들에는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만한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이 시인의 예민한 시선을 통과하여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그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무대 위에 올려진다. 폭발하는 정념을 감춘 채 자못 담담하게 쓰인 시의 말들을 읽고 곱씹다 보면, 읽는 이들은 평소에 숨기고 지냈던 감정이 떠올라 동해지고,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해본 옛일을 떠올리며 마음이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모쪼록 생각이 많아지는 시편들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아등바등 살아오던 지난날들이 문득 생각나 애잔한 위로를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살아가며 때때로 좌절한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며 오래도록 기억한다. 상실과 애도의 진한 마음은 오래 남는다. 시인은 그것을 담아두었다가 참지 못하고 노래로 내뱉는다. 내뱉어진 이야기가 시인의 각별한 시 언어로 투영된다. 그 내밀한 음성은 단지 시인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읽는 이 모두가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노랫말이 된다.
나는 이번 『시인들』 7호 계간평에서 5호와 6호에 수록된 시편들을 통해 누구나 경험해 봤을 법한 일상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 안에 묻은 속 깊은 이야기들을 몇 가지 끄집어내 독자들과 함께 읽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시인의 투덜거림과 한탄, 상실의 슬픔, 그럼에도 끌어올린 삶에 대한 의지, 사랑의 정서가 묻어있다. 늘 기쁘고 행복할 수만은 없는 각박한 일상이다. 살다 보면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목격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려고 하다가 나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좌절한다. 그렇지만 일상이 숭고한 이유는, 생채기가 아물고 낫는 과정에서 어느새 마음은 단단해지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계속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비가 와도 언젠가는 땅이 굳고 새순이 돋는다. 대지 위에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이 깃든 사랑이 알게 모르게 묻어있다. 일상은 우리를 아프게 하면서 또 동시에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 인간이 싫다. 이해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싫다. 나는 마지막에 우는 자. 엉망진창으로 통곡하는 자, 늘 지는 자, 넘어지고 뒤처지는 자다. 불 꺼진 뒤 도착하는 자, 빈 잔을 받는 자, 나의 빈 자루는 이보다 더 빌 수 없고 터진 곳도 구멍도 많지만, 나의 소중한 자루, 꽃도 빵도 없지만 자루 속에는 작은 것을 넣을 수는 없다. 예컨대 밀가루나 곡식이나 소금을 넣을 수는 없다. 큰 것은 넣을 수 있다. 이를테면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러시아, 유라시아 대륙,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 마리의 이구아나. …
임유영, 「연해주」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그는 이해받고 배려받지 못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을 혐오하며 혐오의 마음을 이해한다. 같은 인간이기에 그 더럽고 복잡한 모든 심보를 백번 이해할지라도, 슬픈 일은 슬픈 일인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아닌 마지막에 ‘우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렇게 시를 통해 시인은 치부를 드러내고야 만다. 시인은 부끄러워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처지의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가. 살면서 울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고 마냥 이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 한번은 그 인생의 쓰디 쓴맛을 기억한다. 시인은 엉망진창으로 통곡했고, 늘 지고 넘어지고 뒤처지고, 불 꺼진 뒤 도착하며, 빈 잔만을 받는다. 그의 빈 자루는 이보다 더 빌 수 없고 터진 곳도 구멍도 많지만, 그는 말한다. 그것은 ‘소중한 자신만의 자루’라고. 이 자루는 하찮은 밀가루나 소금 따위를 담는 것이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나 연해주, 유라시아 대륙와 같은 ‘큰 것’, 위대함을 담을 수 있다고, 시인은 썩 자부한다. 아무리 엎어지고 깨지는 삶이라 한들, 내 안에 담긴 가장 큰 것, 보이지 않지만 위대한 마음은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랑거리일 것이니, 작고 가여운 시인은 위대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
늘 지고, 뒤처지고 빈 잔을 받는 사람, 초라해 보이는 나일지언정, 내 안에 가득한 커다란 것, ‘연해주’를 기어코 드러내는 시인의 마음은 정녕 크다. 이 고백은 오히려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며, 남다른 기백을 품고 있다. ‘연해주’의 비유를 통해 마침내 드러나는 화자의 기품이 그 자신을 위대하게 한다.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 하지 않았나. 시를 통해 시인은 위대해지며, 읽는 이는 그 위대함을 읽어내며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공중이 더욱 가지런해지는 세상에서 반듯한 이마를 갖고도 벽에 박던 매일 꿈속의 장면이 대신 부서졌지만. 그런 나날은 모두 잊고 우리 모두 꽃다발을 하나씩 품고 나란히 모여 정식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주저한 끝에 건네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혹 말없이 차이더라도 기분 좋게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모든 말은 침묵과 울음에서 출발했으니까.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말 덕분에 우리는 잠시 꽃다발을 껴안아도 좋다. 아무도 이 휴가를 붙잡고 흔들지 않고.
이기리, 「꽃다발」
임유영의 시에서 ‘연해주’가 그랬듯이, 이기리의 「꽃다발」에서도 화자의 배포 가득한 고백이 있다. 꽃다발은 누군가에 건네는 진심 어린 축하의 선물이다. 알록달록 생기 가득한 꽃 한 송이 한 송이 아끼는 그 사람에게 전하고픈 심심찮은 애정을 담고 있다. 행여 그 진심이 닿지 못해 차일지언정, 시인은 그 마음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주저한 끝에 건네는’ 것이라고, 그만큼 진실한 그것을 사람들은 껴안아 주기를, 행여 세상이 그 마음을 매몰차게 걷어차고 거절할지라도, 언젠가는 하나씩 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세상에 배신당하고 거절당할지라도 세상을 다시 껴안을 용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 세 번 차여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털털한 마음, 나를 차 버린 그 사람을 담담하게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그릇, 그런 사랑의 배포가 참 좋지 않은가?
1978. 4. 12일경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항상 기쁨과 환희의 감정으로 살아갈 수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다. 늘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물리적인 정황에 놓일 때, 사랑하는 누군가가 부재하게 되는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다. 함께 있을 적에 더 사랑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사라진 누군가의 지난 행적이 사소한 사건들을 통해 두고두고 떠올라 회한에 젖은 채 떠난 사람을 원망하고 그리워한다.
어머니를 잃고 오랜 시간 상실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롤랑바르트는 『애도일기』를 통해 회한에 젖은 마음을 토로하고, 그 마음을 곰곰이 돌이켜보기도 하였다. 그는 기록이 단순히 몇 가지의 기억을 문자로 남기기 위한 자료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애도일기를 통해 꾸준히 감정 변화를 기록하며 자신의 마음을 세심히 살피려고 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비참함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이었다. 애도일기는 상실의 슬픔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고민의 과정을 통째로 그려낸다.
펼쳐보는 사진첩은 벌써 낙엽이 되었습니다. 하얗게 물들 때를 기다리며 당신은 가고 오고 영영 떠나는 걸지도 모르지만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새겨진 표정을 떠올리고 시간은 빨리 간다고 했던가요 기어이 씨앗들이 문을 박차고
그럼에도 그늘은 늘 여기 있습니다.
4.
이제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당신을 이해합니다. 문의 바깥에서 문을 쳐다보는 일 포근한 가을볕에서 꿈을 꾸는 일 이제는 내가 당신이 되는 일
이현곤, 「공작단풍나무」
그리워하는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일치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공작단풍나무를 바라보다가 이제는 곁에 없는 ‘당신’을 떠올린다. 공작새처럼 날개를 펼쳐놓은 모양 덕에 풍성하면서도 그 아래 그늘이 짙게 드러나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늘이 질 정도로 애처롭게 그리던 당신을 떠올린 것이다. 마음 깊이 두는 바람에 잊을 수 없는 떠난 이의 ‘표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너무 늙어’버리고 말았고, 나의 상상 안에서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애석하게도 사랑이 유달리 애달프고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고통의 시간이 길수록 사랑의 감정은 성숙해진다. 함께 있을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해가 가는 듯하다. 떠난 사람에 대한 깊은 상념은 비로소 ‘당신을 이해’하게 한다. 시 속에서 화자와 ‘당신’은 마침내 함께 ‘꿈을 꾸고’, 급기야 ‘내가 당신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움은 두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든다. 바르트의 말처럼 “난 이해하고 싶어!”라는 말은 결국 ‘사랑의 외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이해하고 싶음과 동시에 상대가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고, 나아가 당신이 와주길 바라는, 당신이 와서 하나가 되고 싶다는 고백의 감추어진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 시간의 뒤틀림을 왔다갔다하는 행동으로 변형시키거나, 리듬을 산출하거나, 언어의 장면을 열고자 한다. ... 다양한 역할(의혹·비난·욕망·우울)이 등장하는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런 언어의 무대화는 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바르트의 설명에 의하면, 시인이 떠난 사람의 부재를 슬퍼하고, 그 슬픔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자기의 언어로 외치고 노래하게 되는 이유는 상실의 경험을 기록하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구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현곤의 「공작단풍나무」에서 가버린 ‘당신’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공작단풍나무의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바르트가 말한 ‘언어의 장면’을 펼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화자는 이별을 겪은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고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방법은 무엇일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염치 있는 사람들이어서 기계를 망가뜨린 죄를 느껴서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자신 때문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후에 나는 염치 없는 사람들을 몇 번 만났고, 그럴 때에는, 너 때문이야, 네 잘못이야, 바득바득 우기며 상대에게 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구나, 그러면 그것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너만 웃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듯, 다시 기계를 굴려볼 수도 있는 거였을까…… 후회했지만
우리는 너무 염치가 있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놓지 못해서 서로에게 얹어 주지도 못해서 누구 하나 손이 자유롭지 못해서
…
나는 이곳에 쓴다
나 때문이야
내 잘못이야
낡고 고장난 기계는 그대로 있고
나는 조용히 두 손을 얹고
생각한다
이 손에 오랫동안 들려 있었던 것의 정체와 무게를
신이인, 「꿈의 기계」
또한, 신이인의 <꿈의 기계>에서는 ‘기계’로 은유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임을 고백하면서 시작되는 이 묘한 사건은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도 같고, 실제로 내가 겪어본 일인 것처럼 낯설지 않다. 고장 난 기계를 둘러싼 사고 처리 과정은 시인의 말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바르트는 이것을 ‘언어의 무대화’라고 칭한다. 부조리를 이해하고 견디기 위해서 시인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리듬을 산출’하며 ‘언어의 장면’을 연다. 다양한 역할이 등장하는 새로운 허구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사건을 이해하는 단서를 찾아낸다. 이것은 문학적인 해소이자, 감정의 출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살다 보면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련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왜?”라는 질문은 맞닥뜨린 사건 앞에서 해답을 찾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내적 고민과 사투의 과정을 시작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러나 시 속에서 화자는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두 손을 얹고 생각’하기로 한다. 돌연 일어난 사고 앞에서 인간은 망연해진다. 누군가에게 ‘값을 치르게 하고’, 누군가는 그 값을 받아 웃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된다 한들,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손익을 따져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이상하게 찝찝한 구석이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 중에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며 외치는 전례가 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책임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 ‘염치에게 저당잡혀서’, 결국 나를 탓한다는 것. 오직 신만이 그 이유를 알 법한, 도무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시련 앞에서 나약한 인간은 남을 비난하고 자신을 어려움에 빠뜨린 상황을 불평하는 대신 자신을 탓하기로 한다. 나를 탓한다는 것, 아픔 앞에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무너져 내리기. 놀랍게도, 악다구니처럼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렸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너져내림’으로써 평화가 찾아온다. 엄숙한 세상 이치 앞에 무릎을 꿇는 인간의 얼굴은 숙연하고, 그 삶은 숭고해진다.
겨울이 괜찮은 건 귤 때문이라고 말하던 당신이었어요
귤 하나가
기다림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
눈이 올까 점을 쳐볼 때마다 손을 보았습니다
노랗게 물든 손끝을 보며
감싸던 동그란 것들을 생각합니다
…
조은영, 「달의 맛」
부끄럽지만 본 계간평에 필자의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결혼한 지 2년이 채 되기 전에 아기가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자녀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테스트기로 임신 사실을 확인한 회사 건물 1층 화장실에서 놀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쁨과 혼란의 감정이 담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몇 주간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고, 잘 때 빼고는 한순간도 가시지 않는 구토 증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일명 ‘토덧 지옥’. 거의 8개월 무렵까지 입덧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겨울이 괜찮은 건 귤 때문’이듯, 혹독한 입덧과 출산의 고통을 버티게 했던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온 나의 아기, 씨앗처럼 작고 소중한 뱃속 생명이었다. 콩처럼 작은 태아 콩순이는 고통스러웠던 2024년의 여름, 가을, 겨울 그 세 계절을 버티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뱃속에서 작게 요동치는 아기에게 말을 걸며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기는 무거운 몸으로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올 때도 지친 나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어느 때보다도 질기게 살아남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일상은 때때로 고통으로 가득해서 사람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아픈 시간은 결국엔 지나가고야 만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게 하는 힘은 ‘귤’처럼 사소한 것에서 온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사실 아주 빛이 나거나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순간은 아주 사소하고 가까운 데에 있다. 조은영의 시 「달의 맛」에서 화자는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그와 주고받았던 일상 속의 소소한 대화를 떠올린다. 지금은 곁에 없는 ‘당신’과 겨울에 함께 먹곤 했던 ‘귤’을 보면서 화자는 시절을 회상한다. 달처럼 노랗고, 작은 ‘귤’의 맛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을 불러다 주는 매개가 되고, 그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화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떠나기 전에는 가까워서 소중한 줄도 몰랐던 사람의 부재를 통해 비로소 사랑이었음을,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사랑의 뿌리는 드러낼 수 없으나
눈빛은 여전히 뜨겁고
물관 속을 들여다보면
내륙의 벌판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
먼 길을 걸어 당도한 이 자리에서
겨울보다 먼저 도착한 바람이 있고 폭설이 있고
반복되는 절기를 지나다
하반신부터 사막이 되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살아간다는 것은
허물어지기 직전의 골조를 온몸으로 껴안고
푸르고 푸른 얼굴들이 모래가 되어 되살아나는 것
하지만, 불모지에서도 우기는,
남쪽으로부터 밀려오고
빗물은 낮은 곳부터 스며들기 마련이다
발끝에 물기가 느껴진다.
김근희, 「고사목」
김근희의 「고사목」에서 시인은 ‘살아간다는 것은 허물어지기 직전의 골조를 온몸으로 껴안는’ 고통이라고 말했다. 가파르고 험한 길을 걷고 또 걸어도, 겨울의 폭설은 어김없이 온다. 하지만 어둡고 추운 자리에서 사랑을 잃고 눈물 흘릴지라도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남쪽의 따뜻한 온기와 사막을 적시는 빗물을 만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푸른 얼굴로 되살아날 수 있는’ 이유는 ‘불모지에서도 우기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버티면 다 지나간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다시 용기와 사랑의 마음을 얻는다. 더 굳세진 마음들이 쌓인다. 삶의 숭고함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굳셈에서 온다.
[참고 문헌]
롤랑 바르트, 김진영 역, 『애도일기』, 걷는나무.
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사랑의 단상』, 동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