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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Jul 23. 2021

자기소개알러지

대체 이 개떡 같은 행위는 누가 만들었을까. 지금 이 공간에서 확 사라지는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살아서 나에 대해 말할 것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자 혹은 그런 행위를 유도하는 자에게 엄청난 벌금을 물리는 제도는 어떨까. 엄마 아빠는 내 이름을 왜 이렇게 평범하게 지었을까. 눈부신 얼굴을 가졌더라면 이깟거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대충 거짓말로 그럴싸한 사람이라고 말해버릴까.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쟁이가 되진 않을까. 내일부터 마술을 좀 익히거나, 성대모사 연습을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를 뭐라고 소개할지 고민한다. 장기자랑 다음으로 내가 싫어하는 일. 내 순서가 오기 전부터 얼굴이 빨개지고, 머릿속이 까매지는 일. 순서가 지나고 나면 안도보다 후회가 더 크게 남아 숨고 싶어 지는 일. 바로 자기소개다. 나만 이런 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고, 수줍음이 많으며, 다소 내성적인 사람 그러나 소외되는 것은 싫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기소개 알러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상황 앞에 서면 비슷한 감정을 경험할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 새터에 가는 버스 안, 사회를 보던 한 학년 선배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시켰다. 노래를 하는 친구도 있었고(그것도 아주 잘), 특이한 이름을 멋지게 소개하는 친구도 있었고, 특별한 이력이나 취미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쁘고 잘생긴 얼굴로 주목을 받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무튼 다 멋지게 소개했다. 나만 빼고. 아직도 가끔씩 이불 킥하는 기억에 의하면 '그럴 만두 하지', '그럴 수밖에'라는 말도 안 되는 개그를 했고, 그때 처음으로 이 알러지가 생겼다. 버스 안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종종 금방 겪은 일처럼 창피함을 느낀다.

대학교 1학년, 3월은 매일 같이 자기소개를 한 거 같다. FM이라는 것을 술집에서 큰소리로 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떤 수업에서는 나를 소개하는 인쇄광고를 만들어야 했는데, 아이데이션부터 발표까지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보기좋게 망했다. 똑같은 이십몇 년을 살아왔는데 왜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는 그토록 달랐을까. 부러움과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4학년이 되어 취업을 준비할 때 이 알러지는 끝을 달렸다. 자랑할만한 스펙도, 특별한 경험도 없는 나의 자소서는 누구보다 부실했다. 취업의 기술을 알려주는 강의를 들어도 씨드가 부족한 사람은 뭘해도 큰 재미를 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직장인이 되었고, 예전만큼 나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알러지는 여전히 남아 알러지를 일으킨다.


스스로를 소개해야 하거나, 누군가의 소개를 들어야 할 때마다 생각한다. 1분 남짓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대놓고 '난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좀 매력없지 않나. 저정도 포장은 사기에 해당하는 거 아닌가. 이 짧은 몇 마디가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고, 어떤 사람인지 규정짓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기엔 저마다의 십수 년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이 아닌가. 솔직히 그거 너무 억지이고 TMI아닌가.

하지만 성공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자기소개를 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지금을 '자기 PR시대'라 명명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작은 것도 크게 만들고 당연한 것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기술이 되었다. 실제로 자기소개에 따라 원하던 것을 얻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를 잘 알리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걸을 수도 있다. 참내...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더 깊이, 제대로, 잘 거짓 없이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될 텐데 왜 이리 서두르는 걸까.



"고양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자기소개 없이도 내가 고양이인 줄 다 알 테니까. 혹은 개나 해바라기, 양파나 감자, 꾸잉칩 뭐 그런 것도 괜찮고.."



면접을 보러 가면 대부분 처음에 자기소개를 시켰다. 처음부터 나는 말문이 막혔고, 초반부터 강력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나는 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배웠던 것들이 있는데 차마 수줍어서 할 수 없었다. 문밖을 나오며 나중에 면접을 보게 될 일이 생긴다면, 합격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포장한 소개 대신 MBTI나 관상, 심리테스트 같은 것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음 INFJ인 걸 보니 나와 성격이 잘 맞겠구먼. 귓볼이 크고 눈이 반짝반짝한 걸 보니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야. 산을 뾰족하게 그리고 창문이 작은 걸 보니 마음을 쉽게 여는 타입이 아니구먼. 뭐 그렇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자기소개가 부끄러운 사람들이여 저한테 오세요)


통성명을 제외한 자기소개를 덧붙이면 10만 원씩 벌금을 내야 하는 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수십수백 번의 자기소개를 겪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힐 것이다. 자기소개가 싫어서라기보다, 소개할만한 것이 없는 자기가 된 것이 못마땅해서.



/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몇 번을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구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어쩌면 우리에게 근사한 자기소개따위 필요없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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