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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Dec 20. 2023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1990년대 일요일 점심시간, 가족들과 늦은 아침을 먹고 할머니 옆에서 송해의 ‘전국 노래자랑’을 보며 한바탕 걸쭉하게 트로트 자락에 젖어들고 나면 비로소 어린이들의 시간이 열리곤 했다. 아기 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가 방영되는 그 시간만큼은 할아버지가 불러도 답하지 않고 티브이 속에 쏙 빠져 보내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요일 오후 시간대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들은 아침에 방영되는 다소 어린 취향의 '디즈니 만화 동산'과는 달리 무언가 조금 더 멋스러운 느낌이 났다. 관람 등급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어린이들마저도 유치하다랄까 조금 더 어린 취향의 만화와 복잡한 서사가 다양하게 얽히는 조금 더 어른스러운 만화가 있다는 것을 구분하여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요일 오후의 만화는 몸은 어린이지만 마음만은 언니이고 싶었던 국민학생 어린이를 다양한 세계로 이끌어 모험을 떠나게 했다.


그 시간대에 방영되는 많은 작품들을 사랑했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독특한 분위기의 만화가 한 편 있다. 밝고 선명한 그림체의 권선징악적 내용으로 점철되던 이야기 사이에서 다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어두운 색채로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2020년이라는 알 수 없는 세계의 공포 속으로 나를 몰아가던 작품! 그것은 바로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이다.

  


때는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진 서기 2020년(2020년이라니 세상에!). 더 이상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오염된 지구를 대신할 유사 행성을 찾아 모험을 떠났지만 돌아오지 않는 독수리호를 수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아이캔'과 로봇 마왕에게 조종당해 아들마저도 기억하지 못하고 대치하는 상황에 놓이는 독수리호의 선장 이야기를 애잔하게 전하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SF의 걸작이다.


어린 나이에도 로봇과 미래 세계라는 낯선 소재 속에서도 인간성의 본질을 건드리는 주제 의식을 담은 이 작품의 이중적인 매력에 두려움과 호기심 섞인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SF문학의 요소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빠져들었듯이 SF는 강한 매력이 있는 장르다. 그러나 동시에 몰입하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하다.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이 많고 비현실적인 소재가 등장하기에 청소년들을 비롯한 젊은 세대가 좋아하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기술적인 설명이 이어지거나 공식화되어 있는 SF의 문학적 장치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독자의 경우에는 오히려 읽기 힘든 작품들이 많아 아이들에게 권하기 힘든 장르이기도 하다. 거기에 덧붙여 다소 비현실적인 이런 작품들을 아이들이 읽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 추천 목록에 넣었다 빼기 일쑤인 장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SF를 권하는 것은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다소 낯선 소재로 서사를 진행하지만 SF의 본질은 오히려 그 어느 장르보다도 휴머니티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SF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려 보자. 생경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림으로써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세계는 어떤 곳이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제는 그 흐름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걸출한 작가들이 우리나라 SF 문학계에 속속 등단하여 너무나도 멋진 작품들을 써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배명훈, 곽재식 등의 젊은 작가들은 한 번도 우리 문학의 주류가 된 적도 그 자리를 넘봐 본 적도 없는 SF 장르를 무서운 기세로 키워내고 있다. 나는 이들의 작품이 고전의 맥락에 올라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 번째는 이 장르의 문학을 즐기는 독자들은 높은 확률로 작가가 되기를 꿈꾸게 되기 때문이다. 열려있는 가능성과 상상력 덕분인지 SF의 독자들은 꾀나 자주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전지적인 신이 되어 거대한 우주를 조물 거리며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창조하고 인물들에게 비범한 성격과 능력, 생김새를 부여하며 독창적으로 아름다운 상상력을 표출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아무런 강압 없는 청소년 독자의 작가 되기 과정이 나는 늘 기대된다.


고백하건대 오늘의 추천도서를 고르는 과정은 즐거웠다. 하루가 다르게 좋은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는 장르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다가 불쑥불쑥 건져 올린 대어를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책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일곱 편이 엮여 있는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SF의 세계 안에서 이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나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위험을 무릅쓴 도전과 같은 전통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치들이다. 도덕책에서 나올 법한 다소 진부한 주제들이 그녀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생경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된다. 그녀의 소설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평행선처럼 걸어가는 타인의 삶에 손을 뻗어 함께 걸어가자 말을 거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그려내는 그녀의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 안에서 아이들과 오래도록 유영하며 온기 있는 미래를 꿈꾸는 수업은 언제라도 즐겁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그들은 모두 혼자였다. 하지만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혼자였다. 외로움에 온몸이 잠식되어 무감하게 살아가는 수연. 머나먼 타국으로 입양되어 고독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완다. 단 한 번도 가족의 도움을 받아 보지 못한 ‘착한 딸’ 난주. 어느 날 문득, 그 존재가 그들의 눈앞에 운명처럼 나타난다. 외로운 사람의 피를 알아보고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뱀파이어. 소름 끼치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 존재는 수연, 완다, 난주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마는데….

- yes24 책소개 -

SF 문단에 홀연히 등장하여 천재의 자리를 꿰어 찬 천선란 작가의 작품이다. 인천 구시가지에 위치한 철마재활병원을 배경으로 쓰인 이 작품을 대표하는 단어는 외로움이다. 아이들을 매혹시키는 소설 속 존재는 뱀파이어이지만 영생을 누리는 그 존재들도, 재활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이다.


김영민 교수는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서 요양원을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삶이었으나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결국 물건이 되고 마는 곳이라고 정의 내린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의 감각을 누리는 아이들이 저물어가는 삶의 마지막을 외로움으로 지새우는 이들의 낯선 삶을 이 소설을 통해 만난다. 뱀파이어의 매력 속에서 재미있게 읽어 내려간 한 권의 소설을 통해 확장되는 삶의 경험은 그들을 성장시키고 세상을 향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그들에게서 인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로운 자들을 홀로 두지 않는 거예요.”라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속삭임 속에서 외로운 타자를 만나 서로를 보듬어 줄 새로운 세상을 꿈꿔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코스모스에서 일반적이라 할 만한 곳은 저 광대하고 냉랭하며 어디로 가나 텅 비어있으며 끝없는 밤으로 채워진 은하 사이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참으로 괴이하고 외로운 곳이라서 그곳에 있는 행성과 별과 은하들이 가슴 시리도록 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중략)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인 걸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우주의 빈 공간을 채워 나가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그 상상력의 크기만큼이나 나와 다른 우주를 포용해 나가는 사고의 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과정이 여기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다. 감각적인 작가들이 그려내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중학생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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