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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03. 2024

읽어도 괜찮아,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그림책 : 그림과 구두 서술이 합쳐진 책의 형태로 대부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만 최근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곽광을 받고 있다.
- 위키백과 -


나는 그림책을 사랑한다. 그림책을 읽을 때에 솟아오르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좋다. 한장 한장 페이지를 넘기며 다음엔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두근거리는 마음도, 그림에 자신의 양분을 내어주고 십분 자세를 낮추어 압축된 말로만 제시되어 있는 글의 울림도 사랑한다. 그림책을 읽으면 평소 줄글을 읽을 때엔 존재감을 숨기며 꼭꼭 숨어 있던 내면의 어떤 부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림책은 나에게는 시가 되는 장르인 셈이다.


이렇게 다양한 매력을 가진 그림책임에도 의외로 많은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이 그림책은 수준이 낮고 어린이들이나 읽는 책이라 여기며 읽기를 거부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림책이 가지는 많은 효용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림책은 그 형식적 특성상 서사 전개나 주제 형성에 글이 차지하는 역할이 적어 문해력이 낮은 아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줄글로만 적혀 있었다면 접근하기 쉽지 않을 생소한 개념이나 철학적 내용도 그림이 일정 부분 의미 형성을 도와주기 때문에 훨씬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도 있다. 시적인 글과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인 삽화 그림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덤인 셈이다.


생각보다 많은 중학생들이 글 읽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총균쇠’와 ‘코스모스’를 읽으며 대입 논술을 준비하는 반면 한 문단을 넘어가는 글을 읽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교실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 아이들은 까마득히 먼 거리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는 셈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 핵심 역량 중의 하나는 공동체-대인관계 역량이다. 대척점에 있는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데에 그림책이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도서관 한쪽에 진열된 300쪽을 넘나드는 권장 도서 목록에 숨이 막혀하는 아이들도 대출석 옆 특별석에 위치한 ‘전천당’이나 ‘흔한 남매’ 등의 책을 보면 반가워하며 다가와 묻곤 한다.

- 이 책도 읽어도 돼요? 이 책 빌려가도 되나요?

책 제목을 숨기며 주변 눈치를 보는 아이들을 크게 칭찬하며 이거 정말 좋은 책이라고 나도 이 책을 읽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때로 슬퍼 눈물 흘렸다고 아직 읽지 않았으면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다음 권까지 손에 쥐어주며 보낸다. 그렇게 읽어 나가는 책들이 다음 책을 불러들여 다음에 다음으로 이어지면 그들은 읽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총균쇠’와 ‘코스모스’를 읽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목록을 가진 꽤 괜찮은 독서인으로 나아간다.


물론 ‘전천당’과 ‘흔한 남매’도 훌륭한 책들이고 각각의 효용이 있겠으나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조금은 결이 다른 책이다. 안나마리아 고치 작가님의 ‘할머니의 팡도르‘와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다. 그림책에서 멀어진, 그러나 언제라도 그들을 부르는 그림책의 말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는 중학생들을 위해 이 책들을 소개한다.


1. 안나마리아 고치 <할머니의 팡도르>

죽음을 기다리던 할머니에게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한 사신이 찾아온다. “나랑 같이 갑시다.” 말하는 사신에게 할머니는 잠깐의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팡도르를 굽는다. 팡도르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연말에 먹는 빵으로 손이 많이 가는 수고로운 음식이다. 할머니는 한 과정 한 과정 팡도르를 만들며 사신에게 맛을 봐 달라고 부탁하고 어느 순간엔가 사신도 그 맛에 빠져들게 된다. 마침내 팡도르가 완성되고 생의 온기와 달콤함을 알아 버린 사신에게 할머니는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이제 갑시다. 갈 시간이야.” 사신의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 할머니는 그와 함께 솜사탕처럼 가볍게 강 너머로 사라진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죽음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책이 또 있을까? 자신의 때를 알고 그것에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갓 태어난 어린아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아이들에게 죽음은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상할 수 없었던 재난의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떠오르는 날들에는 이 책을 함께 읽는다. 마땅히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어야 했을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아이들과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치유받는다. 죽은 자들이 남긴 레시피를 통해 우리의 달콤한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함께 세길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드는 이 이야기를 중학생들에게 선물한다.


2.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중학생들과 읽었을 때 가장 호응이 좋은 그림책 중의 하나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작가의 그림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제각각의 이유로 외롭고 힘든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위로하는 예쁜 글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해하기 쉬운 아포리즘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시 같기도 한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읽으며 조금 더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많은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


https://youtu.be/Fbdem4g_LEc?si=FiPguDRCLU1dG8DQ




좋은 그림책은 작가가 그려낸 아름다운 세계 속으로 글이라는 매개체를 초월하여 독자들을 데려간다. 소설 속 세계는 개개 독자의 의식 속에 다양하게 그려지지만 그림책 속 세계는 삽화 안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같은 장소에 우리를 불러 앉힌다. 글과 말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곳을 탐닉하는 일을 중학생이라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어떤 엄청난 책도 내가 좋아하고 내가 충분히 이해하는 책만큼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없기에 그곳에서 푹 쉬며 마음껏 따뜻함을 채워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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