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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10. 2024

국어 교사 엄마는 어떤 책을 읽힐까?

겨울방학 특집. 그래서 댁의 아이는 책을 읽습니까?

겨울 방학이다. 아직 생기부와 완벽하게 이별하지는 못했지만, 길고 긴 업무 목록 끝에 나도 뒤늦은 겨울 방학을 맞았다. 엄마가 없는 방학 동안 우리 집 아이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자유를 누렸다. 늦잠 자고 일어나 잔소리 없이 티비도 실컷 보고, 게임도 하고, 마음껏 집 안을 어지럽히며 장난감 놀이도 했다. 틈틈이 엄마에게 전화해 퇴근 시간을 체크하는 치밀함까지 갖추며 하고 싶은 것들을 실컷 누렸다.


엄마 없는 시간을 실컷 누렸으니 이제 바짝 긴장해야 할 때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방학이라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평소의 루틴대로 일어나서 밥을 먹고 실컷 놀다가 저녁 시간의 짧은 공부로 끝나는 하루. 딱 한 가지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독서량이다.


<중학생도 때로 책을 읽습니다.>를 연재하며 많은 독자님들께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책을 권하는 지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고민 끝에 평범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에게 독서에 진심인 엄마가 책 권하는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한다. 오늘도 부디 영업에 성공하여 많은 이들을 독서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첫 번째 전략. 모든 것은 아이의 눈빛에서 시작된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책을 권하는 첫 번째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의 관심사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아이가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느 상황에서도 아이를 붙잡아 두게 하는 한 방이 있는 책은 없는지 관찰해야 한다. 그 누구도 해줄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일. 내 아이를 관찰하는 일이야 말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우리 아이에게 백발백중 통하는 킥은 동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룡 이름을 줄줄 외던 아이는 동물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아이로 자라났고 아직도 온갖 피겨들로 가득한 그의 방은 집 안의 작은 밀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이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동물들이 등장하는 책은 얼마나 큰 은인인지 모른다. 야옹야옹, 어흥, 음메~ 소리를 내며 읽어 주던 동물 책에서 시작하여 아이와 함께 코를 훌쩍이며 읽어 내려간 긴긴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독서 시간의 많은 부분을 무해한 동물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런 내 아이가 요즘 읽는 책은 사이먼 반즈의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이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누구의 권유도 없이 펼쳐 들고 몰입하여 읽는 모습은 부모에게는 감격 그 자체다. 그러나 평범한 아이가 이 책을 스스로 집어 들었을 리 없다. 수많은 실패 끝에 아이의 취향을 파악해 온 엄마의 한 수이다.


두 번째 전략. 아이가 잘 읽는 만화책에서 독서의 문을 열어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해서 동물에 관련된 책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아이가 돌봄 교실에서 '마법 천자문'을 읽고 와서는 최근에 출간된 62권을 사달라고 졸랐다. 나 또한 여느 부모와 같아서 아이가 만화책 읽는 것을 썩 반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는 아이의 취향에 따라 책을 고를 것이고 때로 실패하고 때론 성공하는 선택의 경험에 따라 자신의 취향을 찾아 나가며 그에게 어울리는 인생을 살아나갈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62권을 주문하느냐, 마느냐 그 정도 수준에 그친다는 것을 알기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주문을 넣었다. 그러나 '마법 천자문'만 읽히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아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마법 천자문'은 그 책의 출발을 '서유기'에 두고 있다. '서유기'를 손오공과 저팔계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중국 명나라 시기의 장편 소설로 고전 중의 고전에 속한다. '마법천자문' 62권과 함께 '서유기' 전편을 중고로 구입하여 아이에게 내밀어 본다. ‘마법 천자문’으로 익숙해진 손오공의 모험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어간다. '마법 천자문'이 열어준 문으로 '서유기'가 걸어 들어갔고 그 길의 끝에는 중국 고전 소설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이를 반기고 있음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세 번째 전략. 생에 한 번은 신화를 만나자.


이번 겨울 방학 독서 계획은 아이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미취학 아동을 위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읽힌 적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신화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신화 읽기의 본질은 서사와 상징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과 불경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화에는 수많은 화소와 이야기 구조가 가득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수없이 많은 문학 작품으로 재창작되어 문학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고를 때 서사 구조의 생략이 많지 않고 그 구조가 잘 드러난 판본을 구입했다. 그리고 아이가 그 글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가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다양한 인물들의 부정적인 감정까지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 성숙에 이르렀을까?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복잡한 서사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나는 70권짜리 중고 전집의 문을 열어 주었다.


모든 아이들에게 '서유기'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많은 부모님들이 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조심스럽게 독서에 다가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학생이니 당연히 책을 읽어야지'가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우리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에서 아이들의 독서가 시작되기를,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하나의 책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끈질기게 이어나가 그곳에 숨어 있는 은밀한 재미를 느낄 수 있기를,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책으로 인해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즘 아이는 오리너구리와 헤르메스에 빠져 있다. 책 속 세상에서 마음껏 여행을 누리다가 현실로 돌아온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어서 좋은 방학이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장 멀리, 가장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가장 다양한 존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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