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연애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나는 이 친구를 철저하게 '감정 쓰레기통'으로 활용했다. 퇴근하고도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와 휴일, 평일을 가리지 않는 문의는 나를 충분히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는 전부 바깥사람에게 향했다. 만나면 싸웠다. 아니 일방적으로 짜증만 냈다. 회사로 인한 스트레스를 그대로 토해냈다. 당시에 학생이었던 바깥사람은 '이 새끼가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수 도 없이 했을 것이다. 사실 그땐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훗날, 바깥사람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나 진짜 그때는 헤어지려고 생각했었어.
당시 이별을 생각하고 있던 바깥사람과 나는 몇 번이나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해서 관계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바깥사람은 밤송이 같은 나를 이래저래 잘 굴릴 줄 알았다. 물론 그 가운데는 많은 업무와 인간관계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 그리고 전배도 있었다.
요즘 바깥사람은 일이 무척이나 많다. 글을 쓰는 지금 크리스마스가 22시를 넘어가는 시점에도 퇴근을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교대근무라 22시가 퇴근 시간인데 퇴근 말고 카톡이 하나 왔다.
아 진짜 다 부숴버리고 싶어. 죽어버려라.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오늘따라 관리하는 설비들이 계속 에러가 나는가 보다. 사실 이번 주 내내 그랬다. 덕분에 크리스마스이브도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내고 아마 다가오는 1월 1일도 보내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11시 넘어서 투덜거리며 들어올 장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그리고 다시 오는 카톡.
'배고파....'
'떡볶이 해줄까? 나 저녁에 튀김 먹고 남은 게 있어'
'응..'
일하느라고 저녁을 걸렀나 보다. 바빠서 저녁을 거르는 일까지는 없는데... 들어보면 요즘 회사에서 밥을 30분도 채 먹지 않고 급히 들어간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잠자기 바쁘다. 연차가 쌓이면서 맡게 되는 일과 책임이 커진 것 같다.
나는 요즘 바깥사람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를 자처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것도 있지만 옆에서 봐도 업무의 강도가 상당하다. 주마다 바뀌는 스케줄과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는 업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듯하다.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말은 대게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적절히 버려주면 그 안에 재활용할만한 것들도 가끔 나온다. 왜 화가 났을까? 꼭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조금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작정 받아주라는 것이 아니다. 들어주며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아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한껏 달아있는 감정을 실컷 쏟아내고 나면 변하는 것들이 보인다. 쏟아냈던 자신의 말과 기분들에 대한 약간의 무안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묻어 나온다. 감정을 배출하는 일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에 언젠가 지친다. 그리고 다시 다독여준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처음부터 이렇게 스무스하게 넘어가진 않았다. 나도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저런 말을 들으면 맞받아쳤다. 왜 회사에서의 감정을 집까지 가져오냐고. 다음번 어려움과 짜증엔 조금 더 단단해지는 일. 혼자서는 그냥 끝내버릴 순간들을 현명한 배출구와 함께 하며 나아진다. 감정 쓰레기통이 마냥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때로는 이런 날 선 투정과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는 바깥사람이 이 역할을 해주었다.
오늘은 그게 떡볶이가 될 것 같다. 퇴근하면서 하는 통화, 집에 와서 먹는 야식으로 오늘의 고단한 하루와 날 선 감정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