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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Jun 19. 2024

02. 해리포터 선생님과 다이아 선생님의 대결

진단서만 있으면 됐는데, 진짜로 우울증


 

 첫 번째 의사 선생님은 50대 초반쯤의 남자선생님이었다.


 내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교실이 너무 무섭다고 했다. 학교에 가는 생각만 해도 숨이 안 쉬어진다고 말했다. 병가를 내려면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며 공무원이나 교사들이 병가나 휴직 때문에 진단서를 떼 달라고 오는데 정신과 진단서는 당일에 절대 발급이 불가능하고 최소 한 달은 진료를 봐서 발급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없는 병을 만들어 낼 수는 없고 의사가 환자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 없지 않냐며 본인의 입장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 와중에 양심적인 이 의사의 직업정신을 이해해 주었다. 심지어 나라도 곤란하겠다는 역지사지의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서는 정신과와 관련한 질병을 증명할 서류에 관한 것은 다른 신체적 질병이랑은 좀 다르게 처리를 해줘야 될 것 같다며 교육청에 문제 제기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지금 노조운동하게 생겼냐 싶었다.) 어쨌든 얼마간의 시간은 있으니 진료를 해서 진단을 내보자고 했다. 뇌파검사, 스트레스 검사, 간단한 우울지표검사 등을 하고 일단은 불안할 때 먹는 약과 수면제를 처방받고 병원을 나왔다.

 

 다음, 그다음 진료에서는 히스토리를 알아서 그런지 나도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진단서 없이 병가를 쓸 수 있는 것은 7일뿐이다. 진단서가 있어야 그다음 병가를 쓸 수 있다. 7일만 쉬다가 학교에 다시 나가는 건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진단서를 꼭 떼주셔야 된다고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라고 매달렸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다고 했다. 며칠새 살도 엄청 빠지고 일상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도 힘이 없어 못 하겠다고 했다. 하루종일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대고 숨이 안 쉬어지는데 이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 진료를 안 온 일주일 동안 다른 것 보다 진단서를 안 떼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나를 더 괴롭혔다. 진단서가 안 나오면 나는 무단결근하는 공무원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남들은 병가로 한달씩, 두달씩 잘도 가던데 그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그런 진단서를 받아왔나 싶었다. 어차피 스캔해서 내는건가, 위조라도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절박하고 힘들었다. 불안장애. 그런걸로 그냥 좀 해주면 안 되나 싶었다. 약보다 진단서를 시원하게 떼준다면 그게 내 치료에 더 효과적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상 느낌이 나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몇 번의 진료를 통해 느낀 의사선생님은 환자를 꾸짖는다거나 근엄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활기가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럼 활기를 주는 약을 드릴게요.”

잠을 자긴 하는데, 중간에 계속 깬다고 하니

“그럼 잠이 안 깨는 약을 드릴게요.”

꿈을 계속 꾼다고 하니

“그럼 꿈 안 꾸는 약을 드릴게요.”

하며 뚝딱뚝딱 약을 지어주었다.

해리포터였다.

와, 이런 식이면 모든 병은 이 병원에서 다 치료하겠다 싶었다.



 해리포터 선생님은 사이비 돌팔이 의사도 아니었고, 특별히 나쁘지도 않았다. 해리포터처럼 증상만 말하면 그에 맞는 약을 고민 없이 뚝딱뚝딱 처방해 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똑똑하게는 보여 신뢰가 가긴 했다. 성의가 없거나 사람을 깔보거나 하지 않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내 상황에 크게 공감해주지는 않았다. 드라이하게 진료하는 것이 의사들의 진료 매뉴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몇 주동안이나 이야기했는데 ‘힘드시겠어요.’ 한 마디 안 해주는 의사에게 조금의 섭섭함도 느껴졌다. 이 병원에 계속 다니면 위안은 못 받고 약만 먹겠구나 싶었다. 또, 병원을 급하게 알아볼 때 유일하게 당일에도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병원이었었기에 마음 한편에 근거 없는 불신이 있었다. 예약이 어렵거나 대기를 오래 해야 되는 병원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첫째, 예약이 어렵고,

 둘째, 여자 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병원을 알아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단 맘카페에 공감 잘해주는 여자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알려달라고 했다. 댓글에 올라온 병원들을 모조리 다 찾아서 별점과 리뷰를 보았다. 맛집 검색과 비슷했다. 별점 평균이 너무 낮으면 일단 가기 싫었고 별점이 평균 이상이라도 ‘진짜 별로예요. 성의 없음.’ 이런 리뷰가 있으면 또 탈락이었다. 안 좋은 평이 하나도 없는 4.99점의 평균을 가진 병원에 전화를 했다. 그날이 4월 말이었는데 예약을 11월 23일에 잡아 줄 수 있다고 했다. 어우, 포기.

 또 다른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2주를 기다려야 했지만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고 집에서도 가까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두 번째 병원은 교보문고가 있는 새 건물에 위치했다. 첫 번째 병원이 있던 건물은 온통 병원뿐이라 진료가 끝나도 숨 돌릴 장소가 없었는데 여기는 교보문고도 가 볼 수 있고, 카페도 종류별로 다 있어서 일단은 마음에 들었다. 병원은 화이트-우드톤의 요즘 감성의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꾸며놓았고 간호사 선생님은 호텔 리셉션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친절하게 접수를 도와주었다. 시작이 좋았다.


 진료실로 들어가서 의사를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내 생각보다 너무 어리고 예뻤다. 많이 봐도 30대 초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푸근한 동네 이모 같은 여자선생님을 바랐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깍쟁이 MZ 똑똑이가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병원에 찾아오게 된 계기를 또 설명해야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상담일지, 사건 요약서, 지난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와 종합심리검사 결과지를 다 꺼내서 보여줬다. 하기 싫은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서 시간 순서대로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서는 질문 몇 가지를 했다. 가장 먼저 진료의 연속성도 치료에 중요해서 물어본다며 병원을 왜 옮기려고 하냐고 질문했다. 원래는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남학생으로부터 받는 내 공포감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하시는 거 같아서 여자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내 편을 찾아 헤매는 찐따 쭈구리가 된 것 같았다. 두 번째 질문은 학교에는 언제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세 번째 질문은 지금 그 학생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 학생을 내가 끝까지 책임졌어야 했나 하는 죄책감이 나를 가장 힘들게 짓누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 의사가 죄책감은 어디 갔냐고 꺼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다.

 이어서 진단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진단서는 최소 1달 이상 진료해야 떼줄 수 있고 진단서는 길어도 1달짜리 밖에 안 끊어줄 거다. 그게 6개월 이상 되면 소견서를 써 줄 테니 대학병원으로 가라. 그 정도 기간 동안 안 나으면 입원 치료 해야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일 것이고, 그럼 입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내 이야기는 다 듣지도 않고 본인은 쉽게 진단서를 떼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꾀병 환자면 가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출근하기 싫어서 진단서 떼러 온 사이비 환자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또 기분이 나빴다.

 

 그때부터 여기는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닫고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의사의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한 것 같지도 않다. 반짝반짝 빛나는 어리고 예쁜 여의사의 다이아 귀걸이만 눈에 들어왔다. 깐 달걀 같은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생기 없고 화장도 안 한 내 얼굴과 너무나 대비되었다. 한강뷰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 나는 돈이 없어요라고 이야기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쩌면, “잘하셨어요. 그런 상황에서 일단은 분리되는 게 맞죠.” 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나마 사건이 있은지 한 달도 더 지났는데 그런 공포와 호흡곤란, 수면장애 증상이 계속되니 의학적으로는 트라우마 증상이 맞다고 했다. 전에 의사는 '트라우마가 되면 안 되는데...'라며, 아직은 트라우마는 아니라는 식의 혼잣말을 했는데 이 의사는 트라우마라고 인정은 해주니 그거 하나는 고마울 지경이었다. 약을 처방하고 직접 약을 들고 와서 어떤 약인지 하나씩 다 설명해 주었다. 의사는 똑똑해 보였고 친절했다. 진료실을 나왔다.

 더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이 계산을 해주었다. 초진이라 4만 8천 원이 나왔는데 다음 주는 더 적게 나올 거라 하며 다음 예약을 잡아주었다. 다음 예약을 잡으며 다음 주에는 안 올 거라고 다짐했다. 의사의 매끈한 피부, 예쁜 눈 화장과 작지만 과하게 반짝이는 다이아 귀걸이만 기억에 남았다. ‘너처럼 잘나고 이쁜 애가 내 어려움을 뭘 알겠니. 돈도 많아서 이런 병원도 차리고 좋겠네. 아주.’ 하는 괜히 꼬인 생각도 같이 남았다. 진료 잘 해준 의사한테 쓸데없는 트집을 잡다니 진정한 못난이 같았다. 그 건물에 식당도 카페도 서점도 있었고 주차시간도 남아 있었지만 뭔가 짜증 나는 기분에 병원 건물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카페에서 아이스라떼를 들이키며 다이아 귀걸이를 검색했다. 귀걸이는 다이아가 2개라 목걸이 보다 더 비쌌다. 다이아 귀걸이를 구경하다가 어느새 연관 검색으로 뜬 랩다이아를 구경했다. 그 의사 선생님의 귀걸이가 작지만 반짝이고 이쁘던데 그건 3부일까 5부일까 하다가 랩다이아로는 둘 다 살 수 있겠다 기뻐하며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와중에 가성비를 따지다니, 나는 우울하지만 합리적인 인간인가 헛웃음이 나와서 검색을 그만두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더니 증상만 말하면 막힘없이 약을 척척 지어주던 해리포터 선생님이 차라리 나았다. 이 선생님에 비하면 해리포터는 걱정하는 척은 해주었었다. 해리포터와 이야기할 때는 내가 초라해지지는 않았다. 진단서도 길게는 못 끊어준다고 엄포를 놓은 건 똑같았지만 치료하다가 안 나으면 대학병원으로 가라든가 입원을 하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안 했었다. 돈 쓰고 시간 쓰고 기분만 나빴다. 해리포터 선생님을 배신한 거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다이아 귀걸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2주 전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 중인가 보다 하고.






다음 이야기 : 지능만은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 50만원짜리 종합심리검사 이야기

+ 진단서를 빨리 발급받기 위해 종합심리검사를 받기로 함.

+ 9시에 커피도 못 마시고 갔더니 정신이 엉망

+ 이것이 말로만 듣던 풀배터리 검사네!

+ 웩슬러 검사 이것은 지능검사다.... 내가 수학선생인데 지능이 낮게 나오는 건 참을 수 없어!

+ 장장 3시간에 걸친 심리검사 이야기. 결국은 울고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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