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의사 선생님은 정신과 진단서를 발급받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했다. 정신과는 정형외과나 이런 게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는 1달 이상의 꾸준한 진료를 통해서만 진단할 수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다. 아마도 내가 그만큼 치료보다 진단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 그게 더 절박했다)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나마 그래도 객관적인 데이터를 갖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종합심리검사인데 그건 시간도 반나절 정도 걸리고 예약도 쉽지 않을 것이고 비용도 50만원 가까이 들어간다고 했다. 한다고 하면 조금 빨리 진단을 할 수 있을 것이긴 한데 비용과 시간이 부담되기 때문에 강권하지는 않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그리고 심리상담센터의 일정은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가서 최대한 빨리 할 수 있는 날짜를 알아서 잡으라고 했다. 이미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은 많이 버렸다. 어쩌면 휴직까지 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손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정신. 내 정신이 더 중요했고, 지금은 내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해리포터 병원과 같은 층에 부설기관쯤으로 붙어있는 심리상담센터로 바로 갔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심리상담 결과를 꼭 받아야 되는데 오늘이라도 다 할 수 있으니까 심리상담 일정을 빨리 잡아달라고 했다. 그때 내가 살이 너무 빠져 내 팔다리가 해골에 붙어있는 뼈처럼 덜렁덜렁 거린다고 느껴질 때였는데 얼굴도 표정도 엉망이라 그 꼴로 심리상담 빨리 잡아달라고 숨을 헐떡이며 부탁하는 것 자체가 너무 비참했다. 왜 여기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두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여차저차 한참의 통화 끝에 이틀 후 오전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
약속된 시간, 상담센터에 도착했다.
상담사는 편견 없이 검사를 진행하려고 하는지 간단한 인사만 하고 검사에 들어갔다.
몸이 천근만근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9시까지 병원에 오는 것 자체가 바빴다. 시작도 안 했는데 지쳤다.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해서 커피도 못 마셨다. 머리가 띵하고 상담사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검사 도중 검사를 중단하고 커피 좀 마셔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카운터에 있는 노란 맥심 커피를 급하게 태워서 마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정신이 번뜩 들 것 같았는데 미지그리하고 입안이 텁텁해지는 믹스커피를 마시니 또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커피도 못 마시고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날 내가 한 검사들은 다음과 같다.
1.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 + BGT 검사
상담사가 검사지의 종이를 넘길 때, '웩슬러'라는 글자가 보였다. 대학교 교육학 시간에 배운 것으로 웩슬러 검사는 지능검사인데, 종합심리검사에서 지능검사도 하는 줄 몰랐다. 순간적으로 나름 수학교사인데, 지능이 낮게 나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쓸데없는 자존심이지만 나의 지적 능력은 온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하는 의지가 생겼다. 초점 없던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선생님의 질문에 최대한 집중해서 답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은 이런 문항이었다.
(1) 무늬가 있는 큐브들을 선생님이 제시한 종이에 있는 그림과 똑같이 맞춘다. (시간 재고 있음/ 긴장됨)
(2) 단어 두 개를 말해주고 공통점을 말하게 했다. (예 : "사과, 수박"이라고 하면 "과일"이라고 답)
(3) 여러 단어의 뜻을 말하게 했다.
(4) 상식 테스트 비슷한 것을 물어보았다. (예 :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나라의 왕은?)
(5) 선, 점 들로 이루어진 도형을 그리게 했다. (예 : . . . . . . . . . . . . . . 를 보여주고 그대로 그리게 함)
(6) 수에 관한 문제들을 풀었다.
떠지지 않는 눈과 흐리멍텅한 머리로 끝없이 집중하려고 하니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탈진상태가 되었다. 드라마에서 봤을 때 치매검사도 이거랑 비슷하던데 나중에 늙어서도 이 검사는 다시 받기 싫을 것 같아 치매에는 안 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아이의 ADHD가 의심된다며 '풀배터리 검사 추천해 주세요' 하는 맘카페의 글들이 생각나 어른인 나도 힘든 이 검사를 아이가 해야 하다니 그들도 안 됐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하면 낮은 인지능력과 집중력이 뽀록날 수밖에 없다 싶었다.
선, 점 들로 이루어진 도형 그리기는 처음에는 ' . . . ' 이나 ' . ㅡ . ㅡ ' 이런 류의 모스부호 비슷한 것으로 시작했다. 나름 칠판에 원이나 사각형이나 좌표를 쫙쫙 대칭, 비율 딱 맞게 그리는데 집착했던 나로서는 점의 개수나 기울기, 대칭성이나 비율 같은 것들을 칼같이 맞춰서 완벽하게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그림이 뒤로 갈수록 점의 개수가 급격하게 늘더니 매직아이를 하는 것처럼 점이 몇 개인지 세기에도 눈이 아팠다. 어쨌든 겨우겨우 9개를 다 그렸는데, 내가 그린 그 A4용지를 빼앗아 가더니 지금 그린 9개 도형 중에 생각나는 대로 다시 그려보라고 했다. 힝. 진작 말해주지. 이제는 각이고 비율이고 상관없이 일단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5개를 다시 그리긴 했는데 더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5개밖에 못 그려서 짜증이 났다.
수에 관한 문제는 더 집중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더 자존심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가장 힘들었다.
처음에는 말하는 순서대로 다시 불러보라고 했다.
"1542" 하면 "1542" 대답하면 되었다. 쉬웠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248274352" 처럼 점점 숫자가 길어졌다.
두 번째는 거꾸로 말하기였다.
"1542" 하면 "2451" 대답하는 거였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뒤로 갈수록 숫자가 점점 길어졌다.
세 번째는 순서대로 배열해서 다시 말하기였다.
"1542" 하면 "1245" 하는 식이었다. 이것도 뒤로 갈수록 숫자가 길어지는 것은 앞의 문항과 똑같았지만 가장 심한 건 "1526427" 처럼 겹치는 숫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병원 창문을 보며 선생님이 불러주는 숫자를 듣고 거기에서 순서대로 배열해서 대답했지만 저걸 듣고 "1224567" 이라고 다시 대답하는 과정은 쉽지는 않았다. 적지 못하고 듣기만 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력이 아주 많이 소비되었다.
또, 중학교 수학에 나오는 능률 문제, "A는 이 일을 다 하는데 4일이 걸리고, B는 이 일을 하는데 6일이 걸린다면 이 일을 두 사람이 함께 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비슷한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야 했다. 나는 종이가 있어야 계산할 수 있는데 이건 짜증이 나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틀린 것 같다.
이 검사를 해야 하는 치매의심 노인들과 ADHD의심 아동들이 다시 한번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지능검사의 신뢰성에 대한 신뢰감이 올라갔다. 이런 검사는 집중력이 낮은 사람들은 바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검사였다.
2. 로르샤하 검사
이 검사도 힘들었다.
데칼코마니 형태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연상되는 것을 말하는 검사였는데, 내가 주로 대답한 것은 '박쥐/곤충/일본 만화에 나오는 요괴/괴물/나비/꽃/ SF영화에 나오는 장면' 들로 돌려막기 하는 수준이었다. 그 외에 것은 생각나지가 않는데 이 그림을 보고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정상인이라면 대체 뭐라고 대답하는지 궁금했다. 이걸 대답하는 와중에 이런 검사를 만든 사람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 냈는지, 어떻게 연구하고 통계를 내서 신뢰도를 높여서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떤 불신에 기반한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입에서 부정적이고 무서운 단어들만 나오는 나 자신을 관찰하면서 '뭐, 우울한 놈들은 가릴 수 있긴 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요괴랑 괴물만 계속 말해서 (실제로 그렇게 느껴짐) 마지막에 컬러 그림을 보고서는 화려하고 예쁜 거라고 한번 말해야 되나 싶었는데, 꽃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빨간색 물감이 퍼진 것들은 피로 보여서 꽃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보니 나의 대답은 popular responses에는 하나도 근접한 게 없었다 싶다.
3. 주제 통각 검사 (TAT)
이것도 역시나 힘들었다. 이 검사는 여러 가지 그림을 보여주고 어떤 상황으로 생각되는지 답하는 검사였다. 내가 이 때도 정상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 모든 연상작용과 대답은 죽음이나 사고, 자살로 연계가 되었다. 무서운 것들만 생각이 되던데 이 검사 역시 우울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하는지가 궁금했다.
심지어 이 그림은, 방 안에 무언가를 보고 놀라는 그림 같다고 했더니 그 무언가는 어떤 것이냐고 해서 "목 매어 자살한 사람이요."라는 대답을 하는 나 자신이 섬뜩했다. 앞에 데칼코마니 검사에 이어서 음울하고 부정정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 침울해졌다.
나의 밝은 에너지는 없어진 것일까.
4. 문장완성검사
문장완성검사는 예전에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괴로운 검사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모에 대한,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마인드 밖에 없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기 때문에 저 문항지에서 나오는
- 내 생각에 가끔 아버지는
- 나의 아버지는
- 아버지와 나는
- 대개 아버지들이란
의 질문지에 쓸 말이 하나도 없었고, 어머니에 대한 내용도 비슷했다.
아버지에 대한 질문에는 무응답 하거나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머니에 대한 질문에는 '나의 어머니는 불편하다.'라고 했던 것 같다.
또, 또, 나의 부모와의 애착이 어쩌고 하는 결과가 나오겠네 싶은 생각에 짜증이 확 몰려왔다.
사람의 인격이나 심리나 성격은 자라온 가정환경이나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의학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그런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내 삶에서도 모든 순간에 충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왜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을까, 우리 부모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늘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지만 애써 일상에서는 덮으려고 해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걸 끄집어 와야 하니 나이 40을 넘어서는 지금 이 지점에서도 계속 화가 난다. 어쨌거나 힘겨운 문장완성검사까지 끝내고 더더더 많은 여러 가지 모든 검사지를 받아서 검사실에서 한참을 작성하고, 마킹하고, 동그라미 치고, 1부터 5까지 중에 어느 정도인지 체크를 하고서야 종이로 하는 모든 검사가 끝났다.
이제 상담 선생님과 하는 면담을 마지막으로 검사가 끝나게 되었다.
상담선생님은 역시 의사 선생님과는 달랐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진심 같은 표정과 리액션으로 내가 계속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말할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를 전전하는 사람은 어디 녹음을 해두든 종이에 경위서를 써서 다니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회상하여 말로 풀어내는 것 자체가 너무나 괴롭다.
상담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누구에게나 그 상황은 힘든 상황입니다. 거기서 빠져나와서 지금은 선생님은 선생님을 돌보셔야 해요."
라고 해주었다. 내가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권위 있는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지만 눈물이 질질 났다. 슬프고, 분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