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은 잃었지만 지적 자존심은 지켰다
결과를 들으러 며칠 뒤, 병원에 다시 갔다.
심리 검사는 센터에서 하고, 결과 분석지는 병원으로 보내서 결과는 의사에게 듣는 시스템이었다.
의사는 결과지를 모니터로 훅훅 넘겨가며 보더니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첫마디는 "아이큐가 상당히 높으시네요."였다. 목표 달성인가. 머리가 빠개질듯한 고통을 이겨내고 극강의 집중을 한 보람(?)이 있었다. 내 아이큐는 130이고 같은 나이대의 성인에 비해서 높은 편이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때 측정한 내 아이큐는 139였는데 내심 더 높게 나와서 140을 넘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뭐 그런 생각까지 하느냐 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다고 하면 웃기려나.
어쨌든 아이큐는 130으로 나와서 체면치레는 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지능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지능지수로 증명했다는 것에 살짝 기뻤다. 해리포터가 머리 좋다고 칭찬도 해주었기 때문에 그것도 좋았다.
결과지를 모니터로 보면서 선생님이 나에게 한 말들은 이렇다.
"지능은 높으시고요"
"회피 방어 기제 있으시고요"
"우울감, 불안감, 내적 고립감 경험하고 있으시고, 불안, 공포 높다고 나오시고요"
"스트레스, 자아강도 낮음, 신체적 반응 있으시고요"
"감정이입 상당히 높게 나오고."
"우울, 불안 상당히 높고."
한참을 보더니,
일단 치료를 하면서 우울증을 고치도록 하고, 트라우마가 되면 안 되니까 상담을 받도록 하자고 했다. 이런 객관적 자료가 있으니 진단서는 발급해 줄 수 있으나 일단은 1달짜리로 해주고 치료되는 양상을 봐서 기간은 나중에 다시 조정하자고 했다. 진단서를 첨부하여 낼 수 있는 병가는 60일이었기에, 2달로 해주시면 안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학교에 진단서를 내러 가는 것 자체가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1달 뒤에 또 서류처리를 해야 한다니 너무나 답답했다. 나는 왜 이런 빡센 선생님을 만났을까, 우울증이라는 것도 정말 충격이고 힘든데 왜 이런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더 힘들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병원이나 상담센터에서 했던 그 어떤 설문에서도 '나는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다',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자살이나 자해에 대한 방법을 생각해 보거나 찾아본 적이 있다' 류의 설문에는 항상 '절대 없다'를 체크했었다.
이렇게 진단서를 받기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면 양심이고 나발이고 그냥 죽고 싶다, 자해해 본 적 있다, 뛰어내리려고 해 본 적 있다 그런 걸 그냥 제일 극단적인 걸로 체크할 걸 그랬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이내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있으니 정신과 진단서를 쉽게 안 떼주지 싶어서, 의사의 저 직업적 완고함이 이해는 갔다.
어쨌든, 해리포터는 진짜 고맙긴 하다.
진단명은 F320. 우울에피소드.
"향후 1개월 이상의 약물 치료 및 상담 치료 필요함"이라고 고맙게도 '이상'이라는 문구를 붙여주었고 그 이상이라는 문구 덕분에 60일의 병가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내가 우울증으로 아프다는 증명서가, 이렇게 기쁠 일인가.
그날 진단서를 빨리 제출해야 한다는 학교의 연락에 바로 진단서를 들고 학교로 갔다. 학교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학교 앞 카페에서 교무부장님을 만나 진단서를 제출했다. 학교 밖까지 나와주신 교무부장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학교 선생님들과 산책하며 가끔 커피 사 먹던 곳, 우리 반 반장, 부반장에게 축하한다, 잘 부탁한다 하며 커피를 사주던 그 상가 거리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나를 볼까 봐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행복해했던 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다니, 나 왜 이렇게 됐을까.
악몽 같던 출퇴근길을 대낮에 거슬러 다시 집으로 왔다.
학교에 오가며 다시 내가 같은 길, 교무실, 교실로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하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걱정이 되었다. 병원에서 학교에 출발할 때 안정제를 한 알 먹었는데 효과가 없는지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 집으로 가니 일단 참아보자 했다.
집에 와서 아이스커피를 들이키며 나의 50만원짜리 심리평가보고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중간중간 나의 마음을 후벼 파는 구절이 있었다.
'피검자는 최근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을 겪으면서 자아강도가 낮아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로 인해 자기 능력이나 역할을 안정적으로 발휘하기 어려우며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에 따른 죄절감, 무기력감, 분노 감정도 적지 않게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샤 검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정서를 처리하는 방식이 회피적이고 방어적인 양상인데 평상시 정서 자극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금번 사건에서 경험하고 있는 내적 동요가 크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여 일상생활의 위협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무기력감이 클 것으로 보이고 이후 자신의 직업적 역할이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신감이 저하되며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겠다.'
이렇게 내 상황을 분석했다. 나도 내가 회피적이고 방어적인 줄은 몰랐는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잘 생각해 보니 나는 회피적이고 방어적인 인간이었다. 나름 다른 사람들과 갈등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의견을 잘 주장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고 딱히 내 의사를 관철시키지 않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는 일은 많이 없었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다. 남이 일을 좀 덜하면 내가 더 해서 그냥 균형을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지랖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더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 일은 내가 양보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해결범위를 넘어서서 나도 멘붕에 빠졌던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니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에는 내 성향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니까.
'한편, 피검자는 원가족 내에서 경험한 심리적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 모습이 예상되기도 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회북 한 후 탐색 과정을 통해 미해결 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도움 되겠다.'
결과지 말미 어디쯤에 있던 이 문구가 또 나를 빡치게 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원가족 타령 그만하자 싶다. 심리 상담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릴 적 상처를 묻고(이것도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잘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전의 기억을 꺼내서 애도하거나 위로하여 달래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다. 예전에 남편과의 부부상담 과정에서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했었지만 그 이후 얼마간 너무나 괴로웠다. 어쨌든 지금은 원가족이고 나발이고 나를 내가 좀 지켜야겠다. 남 탓할 겨를이 없다. 일단 무너진 나 자신부터 서서히 좀 끌어서 세워줘야겠다.
나는 우울증에 굴복하지 않겠다.
이것이 종합심리검사에 대한 나의 결론이었다.
+ 나의 거취로, 이렇게 관리자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하다니
+ 내 작고 소중한 월급..........
+ 다시 거기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