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돌이 되기 전부터, '6학년 때쯤 되면 유럽은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보태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에 매달 10만원씩 적금을 부었습니다. 곧 둘째가 태어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까지 하느라 유럽여행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교사라 방학이 있었지만, 남편의 계속되는 해외근무와 지방출장에 모두가 길게 어디 여행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학군지에 사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 다니는 학원에 이것저것 보내다 보니, 짧은 2박 3일 여행으로 학원에 한두 번 빠지는 것도 아까워하는 쫌생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6학년, 아들이 3학년인 작년 봄이었습니다. 이번 겨울방학 때 만약 이 적금을 쓰지 않는다면, 딸이 중학생이 되고 난 후에는 더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 말은 더 안 들을 것이고, 가족여행을 순순히 갈지도 의문이고요. 아이들과 저의 방학을 맞추려면 1월에 가야 했는데, 남편은 1월에는 휴가를 못 낸다고 했습니다. 저 혼자라도 애들 데리고 가도 되냐니까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래? 그럼 진짜 간다!' 하며, 그날 바로 [런던 in - 파리 out]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온갖 걱정들이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사춘기가 절정인 딸아이와 얼굴만 맞대면 싸울 때였습니다. 5분만 같이 있어도 싸우는데, 열흘씩 매일 얼굴 맞대고 붙어 있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돈만 쓰고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겨울에 가려면 짐도 엄청날 텐데, 아직은 3학년인 조그만 아들이 본인 몫의 캐리어를 다 끌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영어는 한 마디도 못 하는데, 영어 잘하는 남편도 없이 돌발상황에 멀쩡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소매치기를 당해서 여권이라도 털리면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춘기와의 동행이었죠. 작은 희망이라도 찾기 위해 유럽여행 카페에 찾아보니 사춘기 데리고 여행 갔다가 온 가족끼리 싸우고 난리난 집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환불할까?
생각했지만 떠나기로 했습니다.
'내가 참으면 되겠지, 뭐.'라고 생각했습니다.
긍정적이고 훌륭한 마인드였지만, 이것은 아주 안일한 생각이었죠.
역시 사춘기는 강했습니다.
많이 참고, 또 참았지만 이 사춘기 자식 놈은 인내심의 한계를 가뿐히 넘기게 해 주었고요.
대판 싸웠고요. 호텔에서 난리 났고요. 경찰 올까 봐 무서웠고요. 아이들은 가는 곳마다 유튜브만 보고요. 박물관, 미술관은 들어가자마자 나가자고 하고요. 스테이크도 싫다, 파스타도 싫다며 빨리 호텔에 가서 라면이나 먹자고 하고요. 남매 둘이 하루종일 붙어있으니 계속 싸우고요.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니 취향도 맞는 게 없고요. 한 놈한테 맞추면, 다른 놈이 화내고 그러다 둘이 또 싸우고요. 엄마는 나만 혼낸다며 저랑 또 싸우고요.
저는 런던에서는 차(茶) 쇼핑 한 번 못하고, 파리에서는 명품 구경은커녕 백화점 근처에도 못 갔고, 그 먼 데까지 가서 인생샷 하나 못 건지고 돌아왔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언제 또 갈까 싶고요. 다음에 또 갈 때는 팍삭 늙어 사진 찍기도 싫을텐데 싶고요.
그렇지만 결론은 ‘안 갔으면 어쩔 뻔!’입니다.
저만 그렇냐고요?
온종일 으르렁 거리고 싸워댔던 저희 딸과 아들도 재미있었다고, 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의 사진첩은 언제나 추억여행 시작 버튼이고요.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들은 몇 번을 이야기해도 항상 깔깔 웃게 되고요. 영화에서세인트폴성당이나 몽마르트가 나오면 “저기, 우리 갔던 데다!”하며 환호합니다.
“또 갈 사람?”
물으면 둘 다 손을 번쩍 듭니다. 셋 다 집안에 있지만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추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죠. 그 순간은 아빠만 왕따가 됩니다.
제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여행책이나 블로그에서는 멋진 사진과 예쁜 맛집들만 가득했습니다. 다른 집안 자식들은 다들 말도 잘 듣고 사진도 잘 찍는 착한 자식들인지, 에펠탑이며 빅벤 앞에서 모두가 활짝 웃는 가족사진도 많더라고요. 심지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책에서 읽고 공부했던 내용을 막 설명해 주는 기특한 자식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식들은 남의 집에만 있다는 것을 그때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주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니까, 간 김에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패키지보다 더 빡센 일정을 잡았습니다. 저는 욕망에 사로잡힌 미친 엄마 가이드였습니다. 여행 정보를 찾으면 찾을 수록 일정은 늘어났습니다. 다들 '여기 가세요, 이거 드세요, 이건 꼭 보세요' 하는 것만 있으니 마이너스는 없고 플러스만 있어서 곱하기가 되어 터질듯한 여행일정이 되었지 말입니다.
그래서 책이나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는 ‘사춘기와 함께 하는 현실 여행’을 글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감성도 없고요. 이쁜 사진도 없어요. 로망도 맛집도 없어요. 정보도 없습니다. 추천 리스트 보다 비추리스트가 더 많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자기 돈 쓰고 이렇게 고생할 일인가’하며 저를 불쌍히 여기실 수도 있고, ‘사춘기 데리고 여행 가서 저럴 줄 몰랐나’하며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제가 여러분의 환상을 와장창 깨 드리는 여행 빌런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망한다’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외국에서 사춘기와 싸우면 어떤 파국이 일어나는지를 알려드릴게요. 그래서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알려드릴게요.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을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에 지는 것이다. The quickest way of ending a war is to lose it.
사춘기와의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도 부상 없이 '무사히' 끝내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말에 따르자면, 끝내려면 져야 합니다. 사춘기에게 잘 져 주기만 한다면, 전쟁은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