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있을 것 같아 걸어갔다'

뚝섬유원지에서 잠실 롯데월드타워까지 걸으며 들은 음악

by 하잎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막연히 집을 나서고 싶을 때


넘쳐나는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기 아까워 바람을 맞으러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드는 날, 목적지는 정해 놓았지만 그 이후는 정하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그런 날이 바로 이 날이었다. 전역 후에 할 것도 없고 알바도 휴무인 그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뚝섬유원지로 놀러 가기로 결심을 했다. 진짜 막연하게 집을 나섰다.


나는 자주 뚝섬 유원지를 간다. 교통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부담 없이 갈 수 있고 갈 때마다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나까지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교에 막 입학해서 동기들과 놀러 왔을 때가 생각이 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이렇듯 뚝섬 유원지는 나에게 언제나 기분 좋고 평화로운 곳이다.




https://youtu.be/HM-nqhPI7 ho

Khalid - 8TEEN


뚝섬 유원지로 가는 지하철의 덜컹거림은 왠지 기대가 되는 즉흥 여행을 더욱 흥겹게 해주었다. 여기에 당찬 10대 뮤지션인 Khalid의 곡인 8TEEN까지 어우러지니 무작정 집을 나서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계획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에 고개를 비트에 맞춰 여유롭게 끄덕였다.


제목처럼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의 18살 때를 떠올려본다. 솔직히 그다지 좋은 기억은 많이 없다.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만이 목표였던 재미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 말고는 별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그저 그런 나이였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 18살 때의 내가 불쌍해 보였다. 모든 과거가 다 그립고 소중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그리움을 가지고 그때만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고등학교 3년인 17세부터 19세까지의 기억은 흐릿한 하늘 마냥 우중충하다. 오히려 재수생활 때가 차라리 더 재미있었을 정도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공부와 친구들 빼고는 유쾌한 기억은 없다.


분명히 10월 중반인데 더웠다. 도대체 가을은 언제 오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잠깐 왔다가 또 바로 겨울로 넘어가는 건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늦여름 날씨였다. 멋 부린다고 입은 가죽재킷이 원망스러웠지만 딱히 벗기는 귀찮아 한강을 바라보면 벤치에 앉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대학생들을 보며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지금을 시원한 강바람을 맞듯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진정한 평화이자 행복이지 않을까 싶다.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은 거대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반사시킬 듯이 선명하게 흘러가고 한강 옆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싶었다. 생각보다 강렬한 햇볕이 사색을 방해했고 걸어갈수록 처음 보는 길과 장소가 나오다 보니 당황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한 롯데월드타워가 보였다. 미세먼지도 없는 맑은 날씨라 뚜렷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문득 저기로 걸어가고 싶어 졌다.


크기가 커서 가까워 보였을 수 도 있지만 한강만 건너면 금방 도착할 줄 알았다. 즉 무조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확신했다. 한강에 다리만 28개가 있기 때문에 건널 방법은 넘치고 잠실대교를 건너서 가자는 나름의 계획도 세웠다. 롯데월드타워까지의 거리와 경로를 굳이 검색해 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큰 숫자에 지레 겁을 먹고 망설일게 분명하니까.


잠실대교를 건너던 도중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한강이 거대한 거울이 되었다.


생각보다 멀었다. 가까워지기는커녕 다가갈수록 롯데월드타워가 같은 속도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가장 고비는 잠실대교까지 였다. 끝없이 이어진 자전거 전용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자전거들을 부러워하며 터벅터벅 1차 목표인 잠실대교를 향해 걸어갔다.


잠실대교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본격적으로 잠실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잠실대교를 두발로 직접 건너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과 정반대로 천천히 한강을 바라보며 건넜다. 잠실대교에서 내려다본 한강은 커다란 거울이었다. 과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빠르게 무심히 지나가던 한강을 나만의 속도로 바라보니 한강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속도는 상대적이다. 잠실대교 위를 달리는 차들과 비교하면 두 다리로 건너는 나는 확실히 느리다. 하지만 비교대상이 없이 나의 걷는 속도만 보았을 때는 내가 느린지, 빠른지 말할 수 없다. 그저 나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든 빨라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보다 빨라졌다.' 상대적으로 느려지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빨라지기를 강요받았고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나의 속도보다' 남의 속도'가 더 중요해졌다. 남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게 곧 내가 도달해야 할 속도가 돼버렸다.


과거 몇 분 만에 빠르게만 지나갔던 한강을 두 다리로 느리게 건너가니 제대로 한강을 감상할 수 있었다. 건너다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을 여유도 생기고 웨이크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과거 수상스키를 타다 물에 빠졌던 기억도 떠올다. 느리기 때문에 한강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더욱 머릿속에 선명히 남길 수 있었다.




아무리 한강이 아름다워도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나의 목표는 롯데월드타워였고 잠실대교는 과정이었다. 잠실대교를 거의 다 건널 무렵 도대체 롯데월드타워로부터 어디쯤인지가 궁금해졌다. 핸드폰을 이용해 거리를 검색해 보려 했지만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와중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듣고 있는 곡을 바꿨다.


https://youtu.be/_aX74 Gc7 fWE

GroovyRoom - 어디쯤에(Some Where)(Feat. 수란)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다. 경로를 검색하면 교통 상황을 고려한 최단거리는 물론 도착시간까지 알려준다. 내비게이션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가족들과 휴가를 가면 아버지는 항상 지도를 펼쳐서 길을 알아보셨다. 요즘은 지도는커녕 검색 몇 번에 가야 할 길을 알아서 정해 준다. 경로를 조금만 이탈해도 바로 새로운 경로를 찾아준다. 내비게이션의 영혼 없는 조언을 주의 깊게 듣는겍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법인 세상이다.


어디쯤에 서있는지 다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아닌 척 날 보네
어디쯤에 와있는지 다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아니 더 상처받긴 싫어
bye


만약 친함과 사랑의 정도를 거리로 나타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효율적이게' 인간관계를 맺고 끊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는 최단경로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쉽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너와 나의 마음의 거리는 5km야, 그러니까 우리는 맞지 않아.'라는 우스갯소리 같은 얘기가 실제로 가능하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느낌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한다. 상대의 마음이 멀어진 것을 수치화해 '어느 정도 멀어졌다'로 표현할 수 없기에 우리는 무척이나 부정확한 '느낌'으로 마음의 거리를 가늠한다. 그래서 더더욱 상대의 마음의 거리를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오해와 다툼이 생겨 끝내 이별을 맞이한다.


가사는 계속 상대방의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멀어졌는지는 영영 모른다. 그저 멀다 가깝다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다. 이별을 예상하는 것을 보니 아주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혼자만의 오해일 수 도 있다. 멀어졌다는 '느낌'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엄청난 거리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실대교를 건너고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가까워질수록 계속해서 어디쯤인지가 궁금했다. 거의 다 왔기 때문일까? 귓가에 울리는 이 곡이 상황과 맞아떨어지니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 따라 불렀다. 하지만 어디쯤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어디쯤인지는 의심만 키우기 때문이다. 어디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걸어가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한 멀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뚝섬 유원지로부터 걸어서 도착했다. 뿌듯하면서도 한심했다. 하지만 걸어오면서 한 많은 생각과 색다른 경험들이 어느 정도 가치관에 영향을 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우뚝 솟은 거대한 건물만을 믿고 걸어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잠실 롯데월드타워가 근방에 있는 어떠한 건물들보다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만약 걸어가는 도중에 가려졌다면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시야에 솟아있었기에 방향을 잡아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이유 없이 집을 나섰고 도착해서 이유를 만들었다. 일단 집을 나왔기 때문에 뚝섬 유원지에 도착을 했고, 롯데월드타워로 걸어갈 생각을 했다. 결국 의도하지 않은 여러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이 단순하지는 않지만 가끔 이렇게 즉흥적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해주니까 바로 '야 도대체 왜 걸어갈 생각을 한 거야?'라는 질문을 던졌다. 조지 말로니의 명언을 인용해 대답을 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가 거기에 있기에'



<걸으면서 들은 다른 음악>

Roosevelt - Night Moves

Khalid - Young Dumb & Broke

PREP - Sunburnt Through the Glass

PREP - Cheapest Flight

KWAYE - Sweetest Life

O.O.O. - 푸른 달

Classixx - Holding On

혁오 - Hooka

Alexander Jean - Whiskey and Morphine

No Vacation - Dræm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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