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잎 Mar 19. 2020

[영화] 1917을 바라본 시선

참혹한 전쟁, 부조리, 인간 상실을 보여준 영화

영화 <1917>



원 컨티뉴어스 숏


영화 <1917>이 단연 화제였던 것은 바로 감탄을 자아내는 현장감이다. <1917>은 독특한 촬영기법,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 그리고 현장감을 살려주는 음향의 조화가 이뤄낸 종합예술작품이다. 이 같은 현실감의 중심에는 '원 컨티뉴어스 숏'이 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법으로 촬영한 영화를 봤을 것이다. 바로 영화 <버드맨>이다. <버드맨>도 '원 컨티뉴어스 숏' 촬영 기법을 바탕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했다. 관객이 배우와 직접 호흡할 수 있는 촬영기법으로 몰입감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을 연속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촬영 기법이다.



<1917>은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촬영에 매우 신경을 쓴 영화이다.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 자연광 상태에서 원 컨티뉴어스 숏 기법으로 촬영해 현실감 넘치는 시간의 변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자연광에서 촬영을 한만큼 각 신(scene)들이 끊기지 않기 위해 비슷한 조건을 가진 날씨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촬영을 했다. 


또한 실제 전쟁터에서 벌어질 법한 배우들의 움직임과 철저하게 계산된 동선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원 컨티뉴어스 숏이 가지고 있는 단점 중 하나인 지루함을 극복하고 관객들에게 숨 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이러한 노력이 인정받은 걸까? <1917>은 관객들을 전쟁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 놓았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것과 같은 생생한 체험을 선사했고 극찬으로 이어졌다. 결국 관객들의 극찬은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음향 믹싱상, 시각효과상을 받은 원동력이 되었다.


미래는 인간을 죽인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마치 <1917>의 두 주인공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와 같이 말이다. 전장의 한 복판과는 이질적이었던 고요하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던 두 청년은 곧 '에린 무어' 장군으로부터 1600명의 목숨이 달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둘 중 누구도 이런 임무를 맡을 줄 몰랐을 것이다. 무모해 보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형을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공포심이 합쳐져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블레이크에겐 머뭇거리는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 눈에 비장함이 깃들어있는 블레이크와 다르게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스코필드는 급류에 휩쓸린 통나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체절명의 운명에 휩쓸린다.



미래는 구명조끼가 없는 인간을 운명이란 급류에 밀어 넣고 상처를 낸 후 죽인다. 주인공으로 느껴질 정도로 목표의식이 뚜렷하던 블레이크의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블레이크의 유언과 부여받은 명령을 등에 업고 목숨을 건 질주를 하는 스코필드, 두 인물 모두 참혹한 전쟁이 가져온 미래가 죽인 희생자들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에서 미래를 예측하며 가지는 희망은 사치고 행복한 결말은 동화 속 얘기다.



결말: 1917년 4월 7일 오후


<1917>의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말은 전쟁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1917년 4월 7일의 오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희생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블레이크의 유언을 전달한 점에서는 해피엔딩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자신의 귀를 찢어 버릴 폭격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것을 알며 가족의 사진을 바라보는 스코필드 입장에서는 새드엔딩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극한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결말이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상영시간이 종료가 되면 우리가 보는 전쟁은 끝나지만 스코필드가 처해있는 1차 세계 대전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위대한 임무를 수행한 스코필드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고했다는 한마디뿐인 것도 허무함을 증폭시킨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가인 알베르 카뮈에겐 2차 세계 대전은 '페스트의 시대'였다. 페스트처럼 전 세계를 집어삼킨 폭력과 부조리, 그리고 인간 상실을 지켜본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설 <페스트>를 집필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전쟁에 의한 인간의 대량학살을 수없이 죽어나가는 페스트 환자들로 보여주며,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전생을 고발하고 전쟁에 저항하는 운동의 형태로 전후세대들의 상처받은 정신을 치유해주고자 했다.


카뮈는 누구나 자신안에 페스트 같은 병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인일 수도 있고, 인간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목숨을 빼앗는 이간상실을 옮기는 페스트 보균자들을 일컫는다. 그래서 항상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1917>도 페스트 병균같은 대량학살을 일삼는 1차세계대전을 사실적으로 전해주며 전쟁이 가져오는 참혹한 행태를 고발한다.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과 이를 시각화한 시체더미들, 철조망에 걸려있는 시체를 표지판으로 표현하는 '레슬리 중위'를 통해 엿보는 만연한 인간 상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블레이크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등.

“적을 전부 죽여야만 전쟁이 끝난다(Last Man Standing)는 매켄지 중령의 대사가 내뱉은 현실이 우리의 눈을 찌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마담 프루스트가 일깨워준 회상의 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