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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조울 Oct 22. 2022

프롤로그

2형 양극성 장애를 앓는 의사

  나는 2형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


  양극성 장애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정신 질환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울증이란 병은 익숙할 것이다. 우울한 기분이 2주 이상 지속되고,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우울증을 의심할 수 있고,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우울증이 아닌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을 수도 있다. 양극성 장애는 ‘조울병’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정신질환이다. 조증과 우울감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1형 양극성 장애, 조증보다 정도가 약한 경조증과 우울삽화가 반복되는 경우를 2형 양극성 장애라고 한다. 조증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혹은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상태이다. 조증을 겪는 환자는 사진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값비싼 명품을 무리해서 구입하기도 하고, 뜬금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오디션을 통해 가수로 데뷔하겠다는 등 무모한 도전을 벌이거나, 며칠을 제대로 자지 않고 먹지 않고도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조증보다 약한, 경조증이 나타나는 2형은 1형만큼 심하지 않은 대신 자주(일반적으로 1년에 수차례 이상) 삽화를 경험한다. 쉽게 말해 덜 아픈데 더 자주 아프다.

  우울증보다는 생소하지만, 사실 2형 양극성 장애는 꽤 흔한 질환이다. 예전에는 평생 유병율이 0.2~0.5% 정도라고 보았는데, 최근 양극성 장애의 개념이 변화하고 진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2형 양극성 장애의 평생 유병율이 3~5%에 달한다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2형 양극성 장애는 주로 우울 삽화로 나타난다. 기분이 들뜨는 경조증은 질병 경과 중 2∼3%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경조증을 겪는 환자들은 대개 활동적이고 의욕적이며 조증과는 다르게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시기에만 병원을 찾게 된다. 따라서 2형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으로 오인되기 싶다. 실제로 양극성 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이 초기에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양극성 장애로 제대로 진단 받는데 평균 10년 정도가 걸린다는 연구도 있다.

  즉, 2형 양극성 장애는 우울증과 겉모습이 꽤 닮은, 사촌 쯤 되는 질환이다.


  그리고, 나는 의사다.

  20대 초반, 의대생 꼬꼬마 시절에 2형 양극성 장애로 처음 진단을 받았다. 여느 정신 질환자처럼, 나도 내 병을 쉬이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예비)의사이기 때문에, 내가 환자의 입장이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세상은 의사와 환자라는 2개의 종족으로 이뤄져 있고, 나는 이미 하나의 종족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른 하나의 종족에는 영원히 귀속될 수 없다는 오만함이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나이가 든 뒤 당뇨나 고혈압에 걸려서 환자가 될 지언정, 젊은 나이에 정신 질환으로 환자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 상태를 부인하고 현실로부터 도망다니는 10년 동안, 내 증상이 양극성 장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으려 무수히 애썼지만 매번 실패했다.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는 동안, 1년에서 1년 반 주기로 경조증과 우울 삽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재발을 겪었다. 2형 양극성 장애는 만성적인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기간을 우울증상으로 보낸다. 자연히 가정, 학교, 직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우울감에 시달리다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도 그랬다. 살면서 자살을 수도 없이 생각했고, 그보다는 적은 횟수만큼, 그러나 진절머리 날만큼 자주 계획했다. 겁이 많아서 끝내 시도까지는 해보지 못했지만.


  마침내 2형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는 공부를 시작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한 번도 펼친 적 없었던 정신과학 교과서를 다시 펼쳐 양극성 장애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증상과 치료, 예후에 대해서 검색 엔진을 뒤져 최신 논문을 찾았다. 그러나 1형과 2형 양극성 장애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묶여 있고, 1형 양극성 장애의 증상이 더 심하다보니 교과서도, 논문도 주로 1형 양극성 장애에 초점을 맞춘다. 2형 양극성 장애만 단독으로 서술한 책은 굉장히 드물고, 유명인의 사례도, 환자들의 수기도 1형 양극성 장애에 대한 경우가 많았다. 자료를 찾고 찾다가 지쳐서 그냥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정신질환에 가해지는 낙인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질병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글은 그 자체로 매우 귀중하다. 이 글은, 나 자신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썼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경조증이나 우울감, 그리고 자살 사고는, 계획은, 시도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나처럼 2형 양극성 장애와 불면증, 자살 사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싶었다. 그럼 적어도, ‘아,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고 소소한 위로 정도는 될 거 같아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아니기에 질병에 대한 아주 전문적인 이야기는 쓸 수 없지만, 최소한 자료를 찾지 못해 (우울증이나 1형 양극성 장애에 비해)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2형 양극성 장애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공감과 지지는, 아니면 최소한 말이나 글을 통한 환기는 꽤 힘이 크다.


  이 글은 익명으로 썼다. 느끼고 생각한 바를 최대한 진솔하게 적으려면 나라는 사람의 신상까지 노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나도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 정도는 이해 주기를, 미리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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