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조울 Nov 02. 2023

중독은 완치될 수 있는가

  얼마 전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챈들러 역으로 출연했던 매튜 페리가 세상을 떠났다. <프렌즈>는 나의 청소년기를 함께했던 시트콤이었고, 챈들러는 나의 ‘최애’ 캐릭터였기에 유독 상심이 컸다.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이 먹먹했다.

  SNS와 인터넷에는 고인을 추모하면서 그의 웃는 얼굴이 담긴 사진과 생전에 남겼던 인터뷰, 글이 올라왔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모두 <프렌즈> 이야기를 하겠지만, <프렌즈>가 내가 했던 많은 일의 목록의 끝부분에 나오길 바랍니다. 그보다 내가 중독자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사람들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바라냐는 질문에 그의 답변이었다. 그는 일평생 술과 약물 중독에 괴로워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했다.

  부고를 계기로 고인의 생전 발자취를 훑어보면서 그가 얼마나 잦은 재발과 치료, 재활 시설 입퇴원을 반복했는지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페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프렌즈> 시즌 3-6 동안에는 술이 아니면 약물에 취해 있었고, 내내 멀쩡했던 시즌은 시즌 9 뿐이었다고 한다. <프렌즈> 종영 이후에도 중독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지난한 싸움이었을까.


  2형 양극성 장애를 부정하고 회피하는 동안, 나는 명백히 술과 수면제에 중독되어 있었다. (‘있었던 것 같다‘고 적으려다 수정했다. 자기기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중독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잘 알기에.

  중독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가끔은 ‘벗어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시 술을 자주 마시고 싶은, 만취하고 싶은, 수면제를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민망할 정도로, 수치스러울 정도로, 불안할 정도로 자주.

  집 바로 앞에 늦은 밤까지 운영하는 가정의학과 의원이 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의사는 내가 의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단기간 수면제 처방에 부쩍 너그러워졌다. (고마우면서도 내가 그 의원을 피하는 이유가 되었다.) 퇴근길, 불 켜진 간판을 볼 때마다 불쑥 그를 찾아가 졸피뎀을 처방받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요즘은 잘 자는 편인데도. 10분도 걸리지 않은 짧은 진료 뒤에 졸피뎀을 몇 알 받아 들면, 그리고 반 알만 먹으면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잠들 수 있을 텐데. 졸피뎀을 먹었을 때의 몽롱함, 나른함, 푹 잘 수 있다는 확신에서 기인한 안정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 수면제를 먹고 싶다.

  ‘하루 치만 받아갈까.’

  어느 날은 큰 길가에 10초 정도 멈춰 서서 고민하기도 한다. 들어갈까 말까.

  '그동안 잘 참아왔으니 하루쯤은 먹어도 되지 않겠어?'

  보상 심리가 꿈틀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윽고 나를 부추기는 생각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수면제 좀 먹고살면 뭐 어때, 남들한테 피해 끼치는 것도 아닌데.'

  '이젠 술도 안 마시잖아. 수면제만 먹으면 괜찮을 거야.'

  '딱 한 알만 먹으면 오늘 밤 정말 잘 잘 수 있어.'

  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선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버린다. 한 번 먹으면 최소한 몇 달은 끊을 수 없다. 못할 짓이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참는 것이다.”

  금연자들 사이에 격언처럼 퍼져있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생 무언가를 피하고 나의 충동을

이겨내야 하다니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몸은 쾌감과 안정효과를 기억하고 있으며, 삶의 변곡에 따라 이런 기억은 지나치게 달콤했던 과거로 미화된다. 딱 한 번만, 이라는 충동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찾아와 집요하고 끈질기게 나를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이런 충동을 이겨내는 비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오롯이 혼자 인내하고 감당해야 한다. 그래, 어떤 중독이든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매일매일 참아내는 것일 뿐.


  그런 의미에서 중독이 완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해는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중독에서 벗어난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 그건 가능하다. 매튜 페리는 재활 시설에 입소해서 고통스러운 디톡스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술을 마시고 약물을 복용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생활을 수 십 년 간 반복했다. 하지만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를 중독자라고만 기억할지 몰라도, 그는 '관해 상태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참아낸 사람'이다. 중독에 빠지고 벗어나는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너무 잘 안다. 이제는 전쟁에서 벗어나 푹 쉬기를.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듦과 스트레스, 양극성 장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