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직원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 한 직원 분이 딸딸아들 중 둘째딸이 미운 짓만 골라하기에 참 골치가 아프다 하였다. 나는 하루에 한 번만 둘째 아이를 따로 불러 “나는 너를 사랑한다” 표현해 주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게 딸딸아들 둘째 딸로서 그 시절 내가 가장 듣고픈 이야기였기에. 고작 6살인 아이가, 유난히 영악하고 못되서 그런 짓을 골라하는 게 아니다. 그 아이는 그저 첫째, 셋째만큼 관심을 받고 싶을 뿐이다.
나의 조언을 들은 직원은, 진심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 한마디 하는 건 힘들지 않다, 그 둘째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을 만큼, 둘째가 미울 뿐.
그럴 수 있다. 아마 나의 부모도 그랬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을 내린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격언은 거짓말이다. 안 아픈 손가락은 분명히 존재한다, 부모도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평범한 인간이기에.
지극히 보통 사람인 우리 부모님에 비해 나는 과하게 머리가 좋았고(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내가 차별 받고 있으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80년대, 아들을 굳이 낳고 싶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둘째딸)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절대 침묵하지 않고 매번 맞섰고, 덕분에 먹고 살기 바쁜 우리 부모님에게 나는 늘 예민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딸이었다. 항상 “나는 너희 삼남매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무 의심없이, 나는 명백하게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었다.
이제서야, 내가 나이가 들고 나의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부모님은 나를 챙기고, 가까이 두려 한다. 지난 날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나를 본인들의 예측 가능한 범위에 두려는 통제 의식이라는 걸 잘 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다 통제 욕구가 과도한 완벽주의자다. 피해의식도, 과대망상도 아니다. 내가 정확히 그들을 닮았기에 그들의 성향을 잘 안다. 자식된 도리도 어쩌면 적당히 받아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매번 굳이 쳐낸다. 도저히 받아줄 수가 없다. 내가 가장 그들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나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들의 안 아픈 손가락이다. 이제는 자존감을 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수 있다. 불운이긴 하나, 어쩔 수 없다. 롤스의 무지의 장막 이론에 따라 나는 부모를 선택할 순 없었으니까.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으며, 고로,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 없다. 나도, 나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나를 통제하길 원했다면, 나의 애정을 받기 원했다면, 그들도 나에게 베풀어야했다.
나는 일말의 죄책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