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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냄 Nov 19. 2022

생각의 덧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칠하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아내와 아이의 제안에 2021년 5월에 시내 인근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관리소가 있는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잔디를 깎고, 풀을 뽑고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마당에 설치한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고, 해먹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동생처럼 챙기는 리트리버도 키우고, 캠핑장에서나 할 수 있었던 불멍도 하게 되니 그 수고로움 들은 감수할만한 것이 되었습니다.       


1년쯤 주택에서 살다 보니 눈에 자꾸 거슬리는 게 생겼습니다. 바깥 풍경에 전혀 안 어울리는 주황색 철제 펜스와 빛바랜 나무 펜스가 제발 좀 새 옷을 입혀달라고 조르고 있었습니다.     

 

200여 개의 나무 펜스를 철제 펜스에서 떼어낸 후 철제 펜스에 페인트칠을 하고, 나무 펜스에 오일스텐을 칠한 뒤 다시 철제 펜스에 고정시켜야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언젠가 해야지 벼르고만 있다가 올해 9월에서야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무 펜스의 나사를 빼서 모두 떼어 내고 주황색 철제 펜스에 깔끔한 검은색 페인트로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철제 펜스 페인트 작업은 다행히 하루 만에 끝냈습니다.  

    

문제는 나무 펜스에 새 옷을 입히는 작업이었습니다. 철물점에서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코코넛 색 오일스텐을 두 통 샀습니다. 직원이 처음 한번 칠하고 마르면 한 번 더 칠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200여 개 펜스를 하루 만에 다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일단 50여 개 정도만 먼저 시작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펜스를 처음 설치할 때만 오일스텐을 칠하고, 이후 6년간 안 칠해서인지 두 번을 칠했는데도, 전혀 코코넛 색깔이 나오지 않고 코팅된 느낌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칠했습니다. 세 번째 칠하더니 색깔이 제법 코코넛 색에 가까워졌지만, 아직은 거무튀튀한 느낌이 나면서 온전한 코코넛 색은 아니었습니다.


힘들지만 한  번 더 칠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원하던 코코넛 색으로 새롭게 태어난 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만 칠하면 된다던 오일스텐을 네 번이나 칠했습니다.     


무슨 일을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냐며 아내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힘들었지만 저는 뿌듯했습니다. 라면봉지에 찍힌 조리 예의 사진처럼 똑같이 생긴 라면을 마주한 기분이랄까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펜스랑 같다고 말입니다. 펜스가 여러 번의 덧칠로 원하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사람도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자 한다면 생각의 덧칠을 여러 번 해야 한다고요. 한 번 두 번 해서는 안 되고, 될 때까지 여러 번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일스텐 없이 오랜 시간 햇볕에 쏘이고, 비바람을 맞으면 펜스는 점점 색이 바래져 가고, 심하면 비틀어지기까지 합니다. 사람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생각을 게을리하면 원하던 모습과 점점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됩니다. 낡은 펜스처럼 빛바랜 생각, 비틀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죠.       


다행인 건 오래된 펜스라도 오일스텐을 바를수록 선명해지듯이, 사람도 생각의 덧칠을 여러 번 해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색깔의 생각을 덧칠하냐도 중요하겠지요. 부정, 나태, 실망, 포기의 색깔이냐. 긍정, 희망, 용기, 도전의 색깔이냐. 어떤 생각을 칠해야 할지는 감이 오시겠죠?

    

코코넛 색으로 다시 태어난 펜스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색깔로 칠 할 거냐고? 고민해보았습니다. 든든한 아빠, 다정한 남편, 가슴 따듯한 공무원, 지혜를 나누는 작가, 좀 진지하긴 하지만 인생 재밌게 사는 사람 냄새나는 사람?     


아직 어느 하나의 색깔을 딱 정하진 못했습니다. 무슨 색깔로 칠할지 고민을 더 해봐야겠습니다. 그래도 펜스가 위로해 줍니다. 그 정도면 색깔의 방향은 어느 정도 잡은 거라고. 정말 어떤 색깔이 어울리는지는 칠해봐야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 칠해보라고 말입니다.

     

생각의 덧칠. 다행히 저는 게을리할 수 없을 듯합니다.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코코넛 색 펜스가 오늘은 무슨 생각을 덧칠했냐고 늘 물어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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