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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23. 2020

산에 대한 진부한 생각들 2

Ep7.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

 어젯밤 기도까지 한 게 민망할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전날 젖은 신발이 아직 덜 말랐고 좀 많이 추운 것 빼 완벽하다. 고산병이 없어서 잠도 잘 잤다. 생리도 거의 끝나가고 몸도 가볍다. 가이드도, 데우랄리 주민들도 트레킹 하기 좋은 날씨라고 했다. 어젯밤, 분명 다 같이 7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다들 뭐 그렇게 준비할 게 많은지 7시 10분이 되어도 도통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어차피 내가 걸음이 좀 느리니까, 먼저 걷고 있으면 다들 곧 따라오겠지, 생각하고 제일 먼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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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잘못 들었다. 베이스캠프 구간 하루에도 몇십 센티씩 눈이 녹았다가 쌓이기를 반복한다. 때문에 앞서 걸었던 이들의 발자국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나무에 하얀 천을 묶어 길을 표시하는데, 이미 사라져버린 발자국을 찾느라고 땅만 보고 걷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직진만 하다 길을 잃었다. 가는 길이 험해서 네발로 기어야 할 정도였지만, 전날 눈이 많이 온 탓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 다음으로 출발한 미기와 그녀의 가이드가 잘못된 길로 올라가고 있는 우릴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산에서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버려 소리전달이 잘 안된다. 우연히 뒤돌아본 오구즈가 다급히 손 흔드는 그들을 발견해서 그나마 다행이. 이게 무슨 망신이람, 괜히 먼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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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분에 무사히 무리 사이로 돌아왔다. 이제 남들보다 앞서 가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딱 가운데서 걷기로 한다.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발이 눈밭에 푹푹 빠졌다. 금세 양말까지 젖어버렸다. 덜 마른 신발 신고 걷기가 찝찝했는데, 아예 푹 적셔주니 오히려 찝찝함 사라져서 좋다. 발가락감각 사라진 덕분에 더이상 발이 시리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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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가락에만 감각이 사라진 줄 알았더니, 뇌에도 감각이 사라졌나 보다. 내 몸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산에서 얻은 깨달음을 주옥같은 말로 만들었던데, 내 뇌는 무의식에서 헤매느라 의식적인 문장은 하나도 잡아낼 수가 없다. 배가 부르면 등산하기 힘드니까 아침도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 배도 안고프다. 뇌가 작동을 멈추니 배가 안고파서 좋다. 뇌가 에너지를 25%나 소비한다는  정말 사실인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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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다. 선글라스를 꼈는데도 눈이 부셔서 눈을 거의 감고 걸었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눈덩이가 계속 굴러 떨어졌다. 무서워서 땅만 보고 빨리 걸었다. 많은 산악인들이 눈 덮인 히말라야가 그렇게나 아름답다고 했는데, 나는 그곳에서의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제대로 눈 뜨고 본 게 있어야 기억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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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에 도착했다. 아주 장관이다. 이래서 히말라야 히말라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오후에 날씨가 안 좋아지면 MBC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에 ABC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버리는 바람에 계속 ABC로 이동하기로 했다. 오늘은 그만 걸어도 될 것 같은데, 날이 너무 좋아도 탈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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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막 벗어날 무렵, 죽을까봐 두려워 더 올라가지 못하고 3일째 mbc에 묶여있는 프랑스 여자와, abc에서 스노우 보드를 타겠다고 그 무거운 스노우 보드를 기어이 들고 올라가는 프랑스 남자 3명을 만났다.  mbc에서는 겁 많은 프랑스 여자를 속으로 비웃었고, mbc를 지나쳐 한참 올라가다 보니 프랑스 남자들이 미친놈들이구나, 생각했다. mbc에 있었을 땐 눈 덮힌 그 곳이 아늑하게 느껴졌는, 멀리서 mbc를 내려다보니 온통 새하얀 눈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롯지들은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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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올라오니 햇빛이 머리 위로 강하게 내리쬔다. 햇빛이 눈밭에 반사돼서 아래서도 올리쬔다. 선크림을 안 바른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강이까지 쌓인 눈은 빠르게 녹아 길이 더 미끄러워졌다. 발은 더 깊게 빠져서 걷가 더 힘들어졌다. 무릎 밑으로는 아주 싹 다 젖어버렸다. 위로는 더운데, 아래는 추웠다. 바람막이 한 겹은 벗고 싶은데, 벗으면 추울 것 같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건 일교차가 큰 산에서 자주 있는 일이지만, 사계절을 동시에 체험하는 건 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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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에 달궈진 눈들이 녹아 구름이 됐다.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려지고 눈보라가 쳤다. 고작 5m쯤 앞서가는 오구즈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다 똑같은 풍경이다. 혼자 허공에 남겨진 기분이다. 걸어도 걸어도 주변 풍경이 안 변하니 내가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건 모르겠다. 그래도 묵묵히 눈에 푹푹 밟힌 발자국을 따라 푹푹 걸어간다. 시각이 둔화된 만큼 청각이 발달했나, 바람 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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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안 보이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개가 있다는 건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거의 다 왔나 보다. 고개를 들었는데 여전히 사방이 뿌옇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젠, 그런거 신경쓰기도 귀찮다. 그냥 걷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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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록달록한 티베트 기도문이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간판이 보였다. 다들 여기서 인증사진 찍었던데, 나도 이 개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증거를 남겨야겠다, 싶었다. 무거운 다리를 옮겨 간판 옆에 섰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머플러로 뺨과 코와 입을 가리고 사진을 찍으니, 이게 도통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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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도착했다. 털이 길고 따뜻한 히말라야 개가 반겼다.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얼어붙은 맨발을 개에게 비볐다. 따뜻하다. 생명은 참 따뜻하구나. 이 추운 곳에서도 온기를 가진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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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왔는데 별 감흥이 없다. 딱히 성취감도 없다. 이 고생을 하면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을 줄 알았는데, 너무 추워서 성격만 더러워진 것 같다.  풍경도 mbc가 더 예뻤던 것 같다. 아니, 동안 지나온 모든 롯지가 다 예뻣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누가 그랬던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라고. 뭐 저 허접한 말이 다 있나,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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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바람에 너무 추웠다. 너무 추워서 움직일 수가 없다. 오후 2시쯤 도착한 것 같은데, 도착해서는 해질 때까지 보온병만 껴안고 있다. 신발이 젖어서 어디 나가기도 귀찮다. 로비에서 이불 두 개 껴고 숨만 쉬고 있는데, 창밖에 눈이 미친 듯이 내렸다. 눈이 새하얗게 빗발치니 마치 눈 속에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 포근하다. 산에서 눈에 묻혀 죽은 사람들은 참 고통스럽게 죽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포근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순식간에 눈이 쌓이고 지들은 파란 지붕만 내놓고는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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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려고 누웠는데, 오구즈가 고산병이 왔다. 입술과 손톱이 보라색으로 변했고, 입술이 심하게 부르터서 입안에서 피맛이 돈다고 했다. 30 분에 한 번씩 깨는 바람에 나도 잠을 설쳤다. 잠에서 깨면 추웠다. 화장실 가기 너무 추워서 일부러 물도 안 마셨는데, 우니까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된다. 어제는 오후 내내 눈원없이도 더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별들이 쏟아질 듯이 빛났다. 안경 없이 하늘을 올려봐도 별이 보일 정도다. 바깥공기 차가웠지만, 목이 져라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오랫동안 바라봤다. 날이 밝아오고도 한참이나 지나 햇빛이 봉우리를 붉으스름하게 비출 때까지 바라봤다. 멋있다. 진짜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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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기서 일출본다고 했던가. Abc에서 일출 봤다는 사람은 죄다 뻥쟁이들이다. Abc에서는 일출을 볼 수가 없다. 9시는 되해가 보이는데

그럼 이미 너무 햇빛이 강해서 쳐다볼 수 없다. 그래도  덕에 일출 기다리느라,  실컷 봤다. 산은 이만하면 다 본 것 같다. 이제 다시 내려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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