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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28. 2020

히말라야에도 락다운이 시작되었다

Ep8. 코로나가 만들어 낸 인종차별

흔히들 산을 '오른다'고 표현하지만, 오른만큼 내려도 가야 하는 이다. 베이스캠프에 오르자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거기가 딱 중간지점이었다. 산을 오르는 게 힘들다는 건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내려오는 까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몸무게와 배낭 무게가 그대로 무릎 짓누르는 바람에 다리가 팅팅 부어올랐다. 오를 때는 그저 높이 오르는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높이 올라봐야 다시 되돌아오는 길만 멀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려니 그동안 올라온 높이가 아까웠지만, 그래도 뭐 어쩔 거야, 여기서 계속 살 것도 아닌데 다시 내려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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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 동안 올랐던 길을 하루 만에 내려와 다시 밤부로 돌아왔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신들의 영역에서 이제 막 인간계로 내려온지라 현실인지능력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겨우 눈사태 위험구간에서 벗어나 한시름 놓겠거니 했는데, 이게 왠걸, 내일부터 '락다운'이란다. 단어조차 생소했던 '락다운'에 대한 이해가 부족 탓에, 그때까지만 해그저 식당이나 카페가 문을 닫는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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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촘롱 체크포인트를 지나는데 직원이 산에서 나가야 한다 다. 안나푸르나뿐 아니라, 랑탕, 에베레스트까지 모든 히말라야 트레킹이 금지되었단다. 아무리 힘들어도 에베레스트는 가보고 싶었기에, 그럼 에베레스트는 언제 다시 갈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직원은 4월 초까지 락다운이 확정되어 있으니 그 후에는 갈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답변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계속 연장되는 락다운에, 한 해가 다 가도록 에베레스트는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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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우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보다 이틀 늦게 올라온 트레커들은 촘롱 체크 포인트에서 막그대로 다시 되돌아 가야 했다. 이미 비용을 지불하고 팀스와 퍼밋을 발급받고 왔지만, 모두 무효화되었다. 예고도 없이 자기 시행된 락다운 공고에 불만이 많았지만,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 놓인 트레커들을 보니 감히 불만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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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온 트레커들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은 그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국제선 공항 폐쇄되면서, 모든 귀국편 항공권이 취소되었다. 그뿐만이랴, 트레킹에 불필요한 짐을 맡겨둔 포카라의 호스텔도, 막대한 보증금을 내고 트레킹 장비를 빌린 렌탈샵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고산에서의 자연재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는 달리,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두통을 유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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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단다에서 만난 와이파이 덕분에 일주일 만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그마한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그제야 현실인지능력이 정상궤도 돌아왔다. 사이 이탈리아가 한국을 앞질러 있었고, 유럽 전역에서 코로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인도에서도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네팔에서도 인도 국경과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늘었다.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나라는 그새 또 늘어서 거의 대부분의 나라를  수 없게 되었다. 원래 뉴스라는 게 보고 있으면 상이 언제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심한 것 같다. 지난 일주일간 쌓인 뉴스를 읽고 있자니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차라리 히말라야 예티가 출몰했다는 뉴스가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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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이 넘는 긴 산행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무릎은 퉁퉁 부어올랐다. 마침 근처에 온천도 있겠다, 다음날은 온천으로 피로를 풀 생각으로 지누단다에서 2박을 예약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생각에 나른해져 락시 (네팔 전통주)도 한 잔 마셨다. 하지만 락다운 규제는 잠시의 여유도 허락치 않았다.  짧은 사이, 지누단다에도 롯지마다 락다운 공문이 붙여졌다. 2박을 흔쾌히 허락했던 롯지 주인은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 재워주겠지만 내일 아침엔 당장 나가야 한다고 했다. 술이 확 다. 그제야 이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네팔의 락다운을 감했다. 이런 예측 불허한 상황에서는 산에 고립되어있는 거보다 도시에 있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온천도, 마르디 히말도 포기하고 바로 포카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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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둘러 포터와 가이드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여러 트레커들과 소통 우리보다도 정보가 없었다. 되려 그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구했다. 어떤 가이드는 자기도 여행사와 연락이 끊겨버렸다는 소릴하며 입으로 방귀를 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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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 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오전 10시에 포카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내일도 운행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른 가이드는 7시간을 걸어 다른 마을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곳에서도 버스가 있는지는 확실 않았다. 네팔리들조차 자기 시작된 락다운에 새로운 정보가 없었고, 온갖 가짜 뉴스만 난무할 뿐이었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 소식까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글로벌 시대에, 히말라야 마을에서는 고작 몇 km 떨어진 다른 마을의 소식도 멀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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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아침까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트레커들은 각자 알아서 믿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우리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결정했다. 만약 버스가 없다면 도로로 내려간 만큼 다시 산을 올라야 했지만 버스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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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무릎을 보채가며 열심히 걸었지만, 그 희망은 끝내 우리를 배신했다. 버스는 보지도 못했고 지프차가 몇 대 있었지만 그것 또한 운행은 불가능했다. 결국 내려간 길을 다시 올라 란드룩으로 향했다. 란드룩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롯지 주인은 산에서 내려온 트레커들에 한해서 방을 내주었다. 차량이 통제되어 바로 포카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법이 엉망일수록 법보다 똑똑한 사람들의 융통성이 필요하다. 이 곳에서도 레커들은 서로 가진 문제들을 공유하기 급급했다. 앞으로의 계에 대해서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서둘러 포카라로 돌아가겠다는 쪽과,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아름다운 경이나 보며 계속 산에 머무르는 다는 쪽이었다. 우리는 전자에 속했다. 어지러운 속세를 외면하고 싶지만, 속세에 두고온 노트북과 고기 반찬이 아른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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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포카라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오르지 걷는 것뿐이었다. 버스, 택시, 개인차량은 물론 오토바이까지도 완전히 통제되었. 윈드폴 사장님께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 대답은 걸어오거나, 혹은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은 경찰차뿐이니 경찰차를 발견하면 얻어 타고 오라는 황망한 답변뿐이었다. 반면 어떤 가이드는 함부 통제중인 도로를 걸어 다녔다가 경찰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병원으로 잡혀 갈 수도 있다고 겁을 줬다. 고로 메인 도로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니, 다시 산을 넘고 넘어 포카라로 이동해야 한다 것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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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포카라로 돌아갈 방법은 확실치 않았지만 산에 더 있을수록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최대한 서둘러 바로 다음날 오스트라캠프로 이동했다. 오캠에 도착했을 땐, 이미 체크포인트마저 닫혀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롯지에 입실하려 했지만 오늘부 손님을 받는 게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래도 근처 다른 롯지에서 우리를 받아준 덕분에 노숙은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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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서 하산 도중 만났던 한국인 베테랑 산악인들을 다시 만났다. 이미 오캠 여러 번 방문하신 그분들은 이 곳이 오캠에서 한식이 가장 맛있는 롯지라고 하셨다.  말을 들으니, 오히려 다른 곳에서 쫓겨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한국사람처럼 생긴,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네팔리 요리사가 만든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이 와중에도 밥은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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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 온 지 2주 차, 어느새 알람 없이도 일찍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른 아침,  트인 롯지 지붕 위에 일출을 감상했다. 구름이 껴서 가 뜨는 건 볼 수 없었지만, 정면으로 새하얗게 보이는 설산 풍경은 여전히 감동이었다. 흐린 락다운에도 여전히 해는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연을 바라볼 때만은 마음이 경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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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캠에서 출발하기 전, 한국 산악분들께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후 2시쯤 한 시간 떨어진 버스 정류장으로 산에 고립된 관광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시에서 보낸 포카 버스가 온다는 것이었다. 한국 대사관을 통해 들은 소식인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다른 트레커들은 이미 버스에 여러 번 배신당한 터라, 그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다. 오캠에서 사는 현지인들도, 지나가는 네팔리도, 가이드, 포터들조차 그 누구도 이 정보 알지 못했다. 결국 버스의 존재를 확신했던 한국분들만 버스정류장에 남, 다른 모든 트레커들은 걷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몇 시간 째 쨍쨍한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발견했다. 역시 한국인 정보력은 히말라야에서도 어디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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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카라에서 나야풀까지 타고 온 로컬버스는 200루피였는데, 포카라로 다시 돌아가는 이 버스는 1000루피였다. 그럼에도 버스를 탈 고민했지만, 이미 2시간을 걸어 내려왔고, 버스가 간드룩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하면 무려 3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결국 우리는 계속 걷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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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가 지나는 넓은 도가에는 작은 마을들이 연달아 있었다. 산에서는 그렇 반가울 수가 없었던 마을이었지만,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더 살벌해졌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코비드 경고문만 붙여놓은 채 굳게 문을 닫았다. 락다운이 시작된 후로 마을 주민들의 외국인 공포증도 더욱 커져, 외국인에게 물 파는 것조차 싫어했다. 겨우 문을 열어준 가게 주인은 우리가 낸 돈을 받기 꺼림칙해하며 돈을 바닥에 두고 가라고 명령했다. 포카라에 가까워질수록 마을 규모는 커졌지만 거리는 한적하기만 했다. 대낮에도 텅 비어버린 거리는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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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량 좀비 마을에서 코로나로부터 가장 위험한 얼굴을 한 아시아인이 걸어 다니는 건 좀비가 돌아다닌 것만큼이나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간혹 마주친 마을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 대놓고 '코리아 코로나'라는 말을 뱉기도 했다. 독일에서 일하는 친구 동양인 혐오현상이 심해져 하루에 몇 번씩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을 때도 원래 동양인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인종 문제가 아니었고, 그래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네팔 정부에서 공권력을 하면서까지 강력히 락다운을 규제하는 바람에 코로나에 대한 공포감은 더욱 심각해. 그 무렵 코로나의 대한 화두는 바로 '죽음'이었다. 네팔리들 사이에서는 '코로나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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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커져있는 국민들의 공포심을 안심시켜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공포심을 더 키우는 네팔 정부의 무능한 대에 화가 났고, 무조건적으로 외국인에게 적대감을 갖는 네팔 사람들의 무례한 도에 화가 났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콜릿을 외치며 달라붙던 아이들마저도 우리를 피했다. 우리도 더 이상 웃으며 '나마스떼'하고 인사하기를 멈췄고, 시비조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 말도 무시하고 걸었다.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되어버린 우리는 마을에서 쉬기도 눈치 보여 마을과 떨어진 그늘을 찾아 쉬어야 했고, 음식을 구할 수도 없었다. 무릎 통증은 점점 더 심졌지만, 이런 불편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통증보다 컸다. 결국, 9시간을 걷더라도 당일 바로 포카라까지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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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지난 설날, '코로나'보다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했을 그 무렵, 한국에도 확진자가 생기긴 했만 여전히 인천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히려 중국 여행을 계획했던 사람들이 인도 여행으로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빈 좌석 없이 꽉 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도로 돌아와야 했다. 사람들은 여행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중국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고, 당시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한식당에서 그날부로 중국인 손님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중국인은 당연히 피해야하는 존재였음으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었다. 국내에서도 중국인 혐오현상이 심해져서 길거리에서 중국인들과 패싸벌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정부는 중국인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곧 한국에서도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 유럽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서는 한국인 혐오현상 또한 날로 심해졌다. 이는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중 감정이 심했던 인도인들에게, 코로나는 오히려 중국인 차별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못했던 인도인들은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조차 꺼려했을 만큼 나를 불편해했고, 그런 행동들은 나도 덩달아 불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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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차별하기를 멈추지 못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집단 이기주의를 합리화시켰고, 사람들을 서로 혐오하게 만들었다. 혐오는 정당화되었고, 집단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소속집단의 기준은 '인종'이라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 나타났다. 텅 빈 거리를 한참 내려오던 중, 맞은편에서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7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를 보았다. 귀여운 모습에 환히 웃어보였지만, 꼬마는 동생의 손을 끌고 우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걸었다. 분노가 슬픔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슬프게 바라보며, 인종차별이 얼마나 본능적인 혐오인가 생각하며, 어쩌면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암울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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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곳을 지나치고 한참을 내려와 드디어 폐와 호수가 정면으로 보이는 해피 빌리지에 도착했다. 포카라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다는 양호한 분위기였. 덕분에 가게에서 초콜릿 과자와 감자칩을 구입할 수 있었다. 산에서는 분위기가 너무 험악했던 탓에 먹기는 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급하게 내려온지라, 구입한 음식들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2주 동안 반강제적으로 이어온 생식 후에 맛보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과자들은 자극적인 도시의 맛이었다. 혀 끝의 닿는 인위적인 그 맛은 바이러스가 대량 생산해낸 '혐오'라는 감정만큼이나 강렬했다. 이로써 트레킹이 끝나고 감자칩을 먹을 수 있는 도시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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