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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Dec 04. 2020

락다운으로 삶의 질이 상승했다

네팔 락다운이 선물해준 휴가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가 있었음에도 한국은 락다운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정확하겠다. 경제 매우 민감 나라이기 때문이다. 락다운을 시행한 다른 국가들도 오래가지 않아 락다운을 해지했다. 코로나보다 락다운으로 인한 경제난이 더 심각했기 때문에 어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원래도 경제가 어려웠던 네팔은 다들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오랜 락다운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네팔, 락다운 없이도 비교적 방역에 성공한 한국과 달리, 코로나 막을 수 없었. 하지만 오랜 락다운에도 방역에 실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계속 락다운을 연장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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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다운 초기, 네팔의 분위기는 살벌다. 외국인 혐오증이 심했고, 거리는 한산했다. 경찰차는 '코로나 바이러스' 말고는 알아듣지 못할 네팔어로 안내 방송을 하며 지나다녔다. 경찰은 긴 막대기를 들고 거리를 배회했다. 가끔은 그 막대기를 높이 들어 올려 시민을 때리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강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통제하는 모습은 과거 한국의 독재정권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경찰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폐와 호수가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윈드폴도 셔터문을 내려야 했다. 이 좋은 뷰를 바로 코앞에 두고도 볼 수 없다니, 아까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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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시행하는 락다운인지라, 네팔 락다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네팔 정부는 약국과 대형마트를 제외하고는 무작정 모든 영업을 중지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식품공급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과도한 규제로 기본적인 생활마저 불가능해지자, 정부는 특정 시간에만 식료품점과 대형마트를 열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밀폐된 공간에 몰리게 만드는 역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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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들과 카페는 업종에 상관없이 모든 영업이 불가능했다. 일부 식당은 몰래 테이크 아웃으로만 영업하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문을 닫았다. 식당가로 번화했던 레이크 사이드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갑자기 변해버린 도시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정부의 어설픈 락다운 규제에도, 네팔리들의 행동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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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많은 '번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번다'는 네팔 특유의 쟁의 수단으로 '국가 총파업'을 뜻한다. 네팔리들은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번다를 다. 번다가 시행되면 락다운과 마찬가지로 모든 경제활동이 정지한다. 호텔도, 식당도, 대중교통도,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춘다. 일 년에 한두 번은 번다를 경험해 온 네팔리들에게 '락다운'쯤이야, 그저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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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낚시꾼들로 북적이던 폐와 호수도 한적하기만 했다. 경찰이 낚시도 경제 활동이라며 금지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네팔리들의 밥상은 더 단출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경찰의 단속을 피해 다시 낚시를 하기 시작다. 호숫가에 늘어선 낚시꾼들은 주변을 살피며 경찰이 어디서 오는지 서로 망을 봤다. 그러다 갑자기 경찰이 출몰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격렬한 술래잡기가 펼쳐졌다. 만약 술래에게 잡히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낚싯대와 잡은 물고기들을 빼앗겼다. 북적이는 마트에서는 지금 한참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데, 이 한적한 호숫가에서 고작 시민들의 낚싯대나 빼앗는 경찰이라니, 진기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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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나자 가게들은 한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규제가 있었기 때문에 겨우 발목까지만 문을 올려놓고 몰래 장사를 했다. 셔터를 살짝 올려놓는 것은 영업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사람들은 쪼그리고 앉아 그 좁은 틈으로 가게 주인을 불러 필요한 물품을 말했다. 그러면 가게 주인은 그 물건을 찾아 손님에게 건네주고 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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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거의 문을 닫아놓고 몰래 장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문을 활짝 올려놓 가게들이 있었다. 레이크 사이드에서 가장 큰 대형마트인 세일즈 웨이가 문을 닫을 시간에도, 그 바로 옆에 퍼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집 아들이 경찰이라나, 뭐라나. 덕분에 그 집은 경쟁자 없이 독점했다. 분명히 코로나 전보다 돈 더 많이 벌었을 것이다. 시민들의 불행은 기득권들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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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 통제도 여전 진행 중이었다. 초기에는 모든 차량을 통제는 바람에 도로에 오토바이 한 대 조차도 없었다. 덕분에 시끄러웠던 도시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했고, 이후엔 병원행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한해서는 교통을 허용해주었다. 그래서 정하 다이는 오토바이를 탈 때면, 늘 병원 진단서를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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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진단서도 없이 함부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경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경찰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오토바이 키를 빼앗다. 그러면 사람들은 남겨진 오토바이와 함께 도로 한복판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 모습을 방 안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니, 벌금을 물 거면 벌금을 달라고 하던가, 사람 저렇게 뻘줌히 세워놓고 뭐하는 짓이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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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와중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하는 사람이 있다. 행색을 보아하니 분명 경찰은 아닌 것 고, 소매를 걷어올린 하얀 와이셔츠에 머리에 쓴 두건이며, 딱 폭주족 스타일이다.  와중에 그의 오토바이 뒤에 걸린 커다란 네팔 국기는 힘차게 펄럭거렸다. 국뽕 넘치는 마을 불량배가 매일 병원에 가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네팔의 왕자란다. 네팔의 왕정이 무너진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빠라스는 락다운에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할 수 있었다. 빠라스,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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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코로나 청정도시가 네팔에는 존재했다. 그것도 대도시에 말이다. 카트만두와 인도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네팔에서 확진자가 늘어가던 시기에도, 네팔에서 인구수가 두 번째로 많은 포카라는 5월이 지나도록 확진자가  없었다. 실제로 없었던 것인지, 아님 발견을 못한 것 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덕분에 공포심리는 완화되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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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빠지고 조용해진 포카라에서의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포카라에서는 누구나 하는 일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졌고,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간들을 즐겼다. 다행히 락다운이 시작됨과 동시에 트레킹이 끝났기 때문에, 락다운은 나에게 산에서 누적된 피로를 풀 수 있는 달콤한 휴식기였다. 덕분에 산에서 그을려 징그럽게 벗겨진 얼굴 각질과 퉁퉁 부어오른 무릎금방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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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이 영업을 정지하면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식량난을 겪었지만, 윈드폴에 머문 덕분에 매끼 걱정 없이 푸짐한 한식을 먹을 수 있었다. 슈퍼 영업시간이 줄긴 했어도 매일 원하는 과자  수 있었고, 사장님네가 자주 가시던 카페에서 원두도  수 있었기에 신선한 드립 커피도 매일 마실 수도 있었다. 심심한 일상이었지만 간 보낼 거리도 많았다. 외국에서 귀한 한국어 종이책도 실컷 었고, 인도에서 공부하려고 챙겨 온 터키어 서적도 들쳐봤다. 지난 2주간 산에서 촬영해 온 200GB가 넘는 영상들 편집하는 것도 시간이 잘 간다. 게다가 그 영상들을 편집할 때까지는 더 여행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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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까지만 해도 '락다운'은 내 삶의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락다운 이후'가 '락다운 이전' 삶보다 질이 더 상승했다. 매일 누군가 차려주는 규칙적인 식사와 규칙적인 수면,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도 한결 더 좋아졌다. 락다운은 여느 숙박업 종사자들이 그렇듯 몇 년을 연중 쉬는 날 없이 바쁘셨던 윈드폴 사장님께도 귀한 휴식시간이었다. 아직 어린 사장님 부부의 딸아이 합법적으로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만큼 신나는 일 없다. 모두가 행복한 락다운이다.


외노자도 여행자도 아닌 포카라 생활


 20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나에게 '팔자 좋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젠 굳이 해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웃어넘기지만, 그동안의 나의 여행은 말 그대로 '집 나와서 개고생'이었다. 여행사 단체 관광도 '여행'이라 칭할 정도로 여행이란 말을 어디에다 쉽게 갖다 붙이는 바람에, 나의 모습도 본의 아니게 럭셔리 관광객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여행 커뮤니티에 쏟아지는 '고작' 500만 원으로 미국 여행 다녀왔다는 영웅담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고작 500만 원'가지고 여행하는 여행자로 비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해온 여행은 '고작' 돈 몇 백씩 가지고 다니면서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동안 나는 '여행자'와 '외노자'사이를 자주 오갔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딘가 계속 이동해야 하는 여행자들에겐 매일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물론 '고작' 몇 백만 원이 있다면, 그것도 훨씬 더 수월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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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노자'의 삶이 힘들었던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여행자'의 삶도 그다지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지만, 여행 속에서는 치열하고 바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여행 사진 속의 나는 활짝 웃고 있지만, 매번 싸우는 게 일이었다. 파티를 즐기는 사진 속의 나는, 가끔은 한국이 그리웠고 외로웠다. 오랜만에 칼질하는 사진을 마치 매일 먹는 것처럼 sns에 올려댔지만, 그 고기 덩어리 한 번 겠다고 몇 끼를 아껴야 했다. 개고생 하며 여행을 했고, 또 그 개고생 한 게 아까워서 개고생 한 여행을 개고생 하며 과시했다. 여행을 하면서, 네이버 블로그부터 인스타그램, 유튜브까지 웬만한 플랫폼을 혼자 다 관리했으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사람들이 내 팔자 좋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무진장 애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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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매일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락다운에는 더 이상 과시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여행 중 처음으로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바쁘게 전환되는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다, 천천히 흐르는 풍경을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선물해준 지독히도 긴 이번 휴가는 그동안 겪어온 휴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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