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라는 토양
“충성”이라는 말은 오랜 세월 동안 군대라는 조직에서 가장 상징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단어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묻고 있다. 충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계급의 높낮이나, 보상 수준, 심지어 혈연과 학연 같은 출신 성분으로 매겨질 수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말한다. 충성은 '고급 아파트'로, '별이 달린 계급장'으로 보상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충성이란 애초에 그렇게 물질적 대가나 지위로 환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삶, 때론 생명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무언의 각오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충성이란 돈으로 살 수 없는 정신적 가치이며, 마음의 태도다.
문제는, 이 숭고한 가치를 정책과 제도, 조직문화가 종종 거꾸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출신이 보직을 독식하고, 특정 학벌이 진급을 지배하며, 일부의 잘못이 전체 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럴 때 충성은 더 이상 헌신이 아니라, 굴종이나 포기로 비치기도 한다. 공정하지 않은 체계 안에서는 아무리 ‘충성’을 외쳐도 그것이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충성’이 특정 진영, 특정 색깔을 향한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충성은 어느 특정 세력이나 파벌을 위한 맹종이 아니다. 진정한 충성은 국가를 향한 충성, 국민을 향한 책임, 그 하나로 귀결된다. 특정 사조직이나 출신의 안위를 위해 존재하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 이기심과 충돌한 충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내가 22년간 군에서 복무하며 느꼈던 충성의 참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존중받는 자리에서 충성은 자란다. 무시당하는 곳에선 아무리 외쳐도 자라지 않는다. 부하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그 수고를 알아봐 주며, 실패했을 때도 질책보다 격려로 손을 내밀어주는 상급자 밑에서 장병들은 ‘진짜 충성’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 충성을 후배에게 전한다.
그래서 충성은 명령으로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충성은 예우에서 시작되고, 인정에서 자라며, 존중으로 완성된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 그 한 사람의 존재를 ‘값진’ 것으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충성은 피어난다.
지금 우리 군이 다시 회복해야 할 가치도 이 충성의 본질이다. 권위나 계급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자발적 헌신, 공정한 대우에 기반한 소명의식, 그리고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감이 군의 진짜 힘이자, 존립의 이유다.
나는 믿는다. 충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의 충성을 기대하기 전에, 그 사람이 충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리더의 책임이며, 오늘 우리 사회가 군에 요구해야 할 변화의 방향이다.
“충성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존중과 공정이라는 토양에서만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