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시간의 흐름이 유난히 느려지는 날이 있다. 며칠 전 친구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 하나가 마음을 붙잡았다.
“이번 모임, 내년 봄으로 미루자.”
단 한 번도 약속을 미루지 않던 친구였다. 불현듯 스치는 불길함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떨렸다.
“장모님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 중환자실이야.”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어제 새벽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새벽의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과 사의 경계가 그렇게 가깝게 다가온 적은 드물었다. 평소 건강하시던 분이었다. 단지 어제와 오늘의 차이일 뿐인데,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출근길을 멈추고, 모든 일정을 조정한 뒤 서둘러 첫 버스에 올랐다. 세 시간 넘는 거리.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늘 살아 있음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예고 없이 도착하는 끝’의 연속이다.
30여 년을 알고 지낸 친구와 제수씨. 친구에게 장모님이라 해도, 내겐 이미 오래된 가족의 한 부분 같았다. 28년 전 처음 뵈었을 때의 정정하신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미소와 눈빛이 아직도 또렷한데,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니.
장례식장에 도착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입관식장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배웅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제수씨가 울먹이며 어머니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엄마... 엄마... 나 엄마 정말 사랑해... 엄청 사랑하는 거 알지...”
그 울음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삶 전체를 걸쳐 전하지 못한 사랑의 말, 이제는 닿지 않을 그리움이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었다. 그 손끝의 떨림과 끊어진 호흡의 공기 속에 ‘사랑한다’는 말의 유한함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새삼 느껴졌다.
그 순간,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는 언어가 무력해진다. 우리가 가진 말 중 어떤 것도 이별의 절벽을 메울 수 없다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돌아오는 길,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또 무엇일까.’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물음은 머릿속에서 한참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산다. 그러나 죽음을 잊은 삶은 언제나 피상적이다. 삶을 진정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그림자를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의 강을 따라 흐르는 두 개의 물결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유한하고, 그 유한함 덕분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긴다.
누군가 “죽음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던가..
그 말이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되돌려주는 거울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지금’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값진지를 안다.
장례식장에서 본 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서로를 위로하던 순간. 그 모습 속에는 슬픔보다 더 깊은 사랑의 온도가 있었다. 죽음은 모든 걸 빼앗아 가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린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말하고, 지금 웃고, 지금 용서하는 것. 언젠가 올 이별을 두려워하기보다 이 순간에 충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죽음을 마주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우리는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가 멈출 때, 또 한 번은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그렇기에 나는 다짐하고 마음에 새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살아가리라고.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해주는 말 한마디, 그것이 어쩌면 삶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열차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나는 문득 내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얼마나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쩌면 겁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총합’이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삶을 온전히 살아야 한다. 매 순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감사하며, 후회 없이.
죽음은 늘 갑작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남겨진 자의 몫은 슬픔이 아니라 기억의 계승이다는 것을... 그들이 남긴 따뜻한 말, 짧은 미소,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남은 자의 사명이다.
나는 여전히 답을 결정하지 못했다.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만이 진짜 ‘삶’을 배운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죽음이 언제 오더라도,
나는 그날까지 살아있음을 잃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