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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나무가 남긴 질문

자연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

by 서담

지난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 차갑게 내려앉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근하던 길, 도시의 풍경 속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높은 빌딩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행렬도 아니었다.

인도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그리고 그 나무의 몸에 새겨진 검은 흔적들.


다친 사람의 몸처럼 퇴색된 껍질 위로 급하게 긁힌 글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누군가 잠시 충동을 참지 못해 새겼을지도 모르는 흔적. 또는 ‘별일 아니겠지’라는 마음으로 그저 재미 삼아 남겼을지 모르는 흔적. 그러나 사람의 몇 초짜리 행동은 나무에게 몇 년, 어쩌면 평생을 남기는 상처가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을 ‘침묵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소리를 내지 않으니,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버텨내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긴다.


하지만 침묵은 무감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이 없다는 이유가 고통이 없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나무의 잎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고, 줄기 한 겹이 벗겨질 때도 신음한다. 다만 우리처럼 목소리로 울지 않을 뿐이다. 나무의 수액이 흘러내리는 자리는 사람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한다.


생명은 모두 소리 없이 다친다. 그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늘 인간 쪽이었다. 그 나무는 도심의 한복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에서 얼마나 오래 서 있었을까. 유치원 아이들이 지나가고, 직장인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택시의 헤드라이트가 스쳐 지나가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무는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세상은 변화하고 바쁘게 돌아가지만 나무는 제자리에 서서 모든 계절을 견딘다. 봄이면 새 잎을 틔우고,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낙엽을 흩날리고, 겨울이면 홀로 앙상한 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그러나 그 겨울, 그 나무는 사람의 흔적까지 함께 견뎌야 했다. 그 흔적은 낙엽처럼 떨어지지 않고, 눈처럼 녹아 사라지지도 않았다.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는다. 어린아이들은 나무 아래에서 놀고, 연인들은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속삭이며 사랑을 키운다. 누군가는 지친 마음을 쉬어가고, 누군가는 나무 옆을 지나며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많은 것을 받은 우리는 자연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때때로 인간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존재가 된다. 바람, 비, 눈보다 인간의 작은 칼끝이 더 깊은 상처가 된다. 자연은 그 상처를 말하지 않고, 소리 없는 방식으로만 고통을 흘려보낼 뿐이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의 뜨거움과 가을의 서늘함이 차례로 나무를 지나갔다.



네 번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나무는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천천히 회복해 갔다. 껍질은 천천히 덮여가고, 상처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다시 생명의 무늬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처가 없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자연은 우리처럼‘기억하는 존재’다. 겉은 치유되었지만 그 자리에 남은 흔적은 자연이 인간에게 조용히 전하는 질문이다.


“다음에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없겠니?”


하지만 인간은 자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오래된 말이 있다. 자연은 인간 없이도 스스로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걷는 땅, 보는 하늘, 쉴 그늘,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손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자연은 인간에게 ‘요구’ 하지 않는다. 단지 조용히 우리 곁을 지켜줄 뿐이다. 그 배려와 묵묵함이 당연해져서는 안 된다. 사람의 손끝 하나는 나무에게는 긴 시간의 통증이다. 사람의 장난 같은 흔적 하나는 자연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상처다.


우리는 이제라도 자연의 침묵을 배려의 신호로 받아 들어야 한다. 다시 나무 옆을 지나면서 한동안 나무의 몸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모습. 상처의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나무는 또다시 껍질을 키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인간보다 훨씬 위대한 회복력을 가진 것처럼 느껴져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무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짐해야 한다. 그 침묵을 무시하지 않겠다고.


“말없는 나무에게 더 이상 불필요한 상처를 남기지 않겠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응답해야 한다. 그 응답의 시작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상처를 남기지 않는 일에서 시작된다. 네 번의 계절이 지나 상처가 아물었지만 제발, 다시는 같은 상처를 남기지 않기를. 그것이 이 나무와, 이 도시의 자연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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