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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먼저 앉는 자리

기꺼이 양보할 생각

by 서담


주말이면 어김없이 걷는 숲길이 있다. 사람의 말소리보다 바람의 숨결이 더 익숙한 길, 내 마음을 오래 묵혀둔 듯한 고요가 먼저 다가오는 길.


그 길을 걷다 보면 내가 늘 지나치는 벤치가 있다. 오랜 시간 아무도 앉지 않았던, 마치 숲이 고이 숨겨둔 쉼터 같은 자리. 그 벤치 위에 오늘은 낙엽들이 먼저 앉아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바람에 실려 하나씩 자리를 잡더니 어느새 벤치 전체가 가을빛으로 덮여 있었다. 마치 오래 비어 있던 자리가 드디어 제 주인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작은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앉으려면, 저 낙엽들에게 비켜달라 말했어야 할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벤치는 원래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오늘만큼은 낙엽들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먼저 빼앗았을 뿐 숲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흔히 자연이 우리 곁을 내어준다고 생각한다. 앉으라고 자리를 마련해 주고, 걷기 좋으라고 길을 열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자연은 함부로 누구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만들고, 우리가 먼저 이름을 붙이며, 우리가 먼저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낙엽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리를 주장하지도, 오래 머물겠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흘러간 계절의 마지막 호흡처럼 잠시 내려앉았다가, 바람의 손길이 닿는 순간 다시 떠날 뿐이다.


오늘 벤치에 앉아 있던 낙엽들을 보며 나는 잠시 자리를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자연이 우리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낙엽은 한 해 동안 자신이 지닌 생의 에너지를 전부 나무에게 돌려주고 난 뒤에야 떨어진다고 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마지막 순간조차 자신의 역할을 다한 생명만이 가진 잔잔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벤치를 가득 채운 낙엽은 누군가의 자리를 뺏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계절의 쉼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몰아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몰아낼 권리도 없었다.


때로는 자리를 비워두는 용기, 또는 누군가에게 먼저 쉬어가라 건네는 배려가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장 오래된 덕목인지도 모른다. 나는 벤치 앞에 서서 언제쯤 낙엽이 떠날지 생각했다. 아마 바람이 조금 더 강해지는 날, 오늘보다 온도가 몇 도 더 내려가는 날, 혹은 눈 내린 하루아침에 모두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나는 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내 자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연은 늘 순환하고 자리는 늘 돌아온다. 나는 잠시 머물다 떠날 자리를 조급하게 차지할 필요가 없다. 기다림은 결코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더 많은 것을 보았다. 햇살이 낙엽 위에서 춤추는 모습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내는 소리를, 흙냄새가 서서히 스며드는 가을을. 내가 앉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을 수많은 풍경들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첫눈이 내리고 나면 벤치는 눈에게도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까? 어쩌면 그때는 서서 겨울을 바라보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삶은 때때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시간에서 더 깊은 의미가 만들어진다.


낙엽들이 앉아 있는 벤치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앉아야 할 때보다 내가 기다려야 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다림 자체가 삶의 한 문장이고,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도. 그러니 지금의 자리는 잠시뿐이다.


낙엽은 곧 사라지고 벤치는 다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그 자리는 언젠가 누군가의 품이 될 것이고 또다시 비워질 것이다. 그렇게 계절은 계속 돌고 자리는 계속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앞에서 이 사실을 조용히 되뇌었다.


“모두가 떠나야 할 자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가 잠시 머물 자리가 있다.”


그러니 조급할 필요도, 빨리 빼앗을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낙엽이 떠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겨울눈이 맨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들에게도 기꺼이 양보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벤치는, 이 숲은, 이 계절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오직 지나가는 모두에게 잠시 머무는 자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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