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골 할머니 뵈러 왔어요

세대가 이어주는 사랑의 방식

by 서담

어제저녁, 가족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 속에는 내 아들과 시골집에 계신 어머니가 함께 웃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방 안, 환하게 웃는 할머니의 얼굴과,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고 있는 아들의 표정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추석, 아들은 앞으로 전방 중대장으로 부임되면 한동안 휴가를 자유롭게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며 미리 어머니를 뵈러 시골로 향했었다. 당시에도 기특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교육 수료를 앞두고 몸과 마음이 한창 피곤할 시기에 또다시 시골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단톡방의 말투는 늘 그랬듯 담백했다.

"주말이라 잠깐 들렀어요. 할머니 건강은 괜찮으시고요."

말은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다.


사실 주말이란 청춘에게 가장 소중한 쉼의 시간이다. 일주일 내내 꽉 조여온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싶은 유일한 날. 보통 같으면 잠을 더 자고, 친구를 만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질 법도 한데, 아들은 거리와 피로를 감수하며 시골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곳에 ‘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셨다. 낡은 담요를 덮고, 손에 익은 조끼를 입고, 구부정한 허리로도 손주는 꼭 안아주는 분. 크고 화려한 말 대신, “밥은 먹었냐”는 한마디에 온 마음을 실을 줄 아는 분. 내가 자식으로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 드는 미안함과 그리움도, 늘 그 한마디에 눅진하게 녹아내리곤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 가자고 하면 으레 투덜거리기 일쑤였다. 긴 이동 시간, 불편한 잠자리,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환경. 그런 것들이 아이들에겐 작은 스트레스였을 테고,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이제는 말없이 스스로의 걸음으로, 오히려 내 대신 먼저 시골을 찾아간다. 그 변화가 고맙고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내가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찾는 일도,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졌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 마음만으로는 충분하다는 자기 합리화. 그렇게 나는 자꾸만 발걸음을 미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빈자리를 채우듯 아이들이 그 길을 대신 걸어가고 있었다.


할머니와 손주가 함께 웃는 사진 한 장, 그리고 뒤이어 올라온 또 한 장의 사진. 뒷모습의 어머니가 밤공기를 가르며 문을 나서는 모습이었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발에는 꽃무늬 덧신. 누가 보아도 손주 배웅 나가는 길.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그 뒷모습은 어쩐지 따뜻해 보였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셨다. 말이 아닌, 발걸음으로. 눈물이 아닌, 손길로. “괜찮다”는 말 대신 “밥 더 먹어”라는 말로 마음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내 아이들이 배워가고 있었다.


부모로서의 내 역할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아이를 통해 나 역시 배워가고 있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말없이 행동하는 것의 힘을, 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사랑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집 앞까지 따라 나와 주는 일. 밤잠 설치며 장작을 더 넣는 일. 손주가 좋아할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곱게 싸두는 일.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사랑의 표현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그 사랑을 되갚기 위해 길을 떠난다. 아들 역시 그 길을 걷고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말없이 시골로 내려가고, 밝은 얼굴로 셀카를 남긴다. 그리고 말한다. "잘 다녀왔어요." 그 짧은 말속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다 담겨 있다.


아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나도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야겠다.’ 아이들의 기특한 발걸음이 내게 부끄러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우리가 어른이라 믿고 있는 그 자리에서, 때로는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길은 어디일까. 수많은 여행지, 맛집, 명소를 떠올려도 내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건 시골집 앞마당,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그 길은 멀고 오래 걸려도, 도착했을 때의 온도는 언제나 따뜻하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다음에도 또 그 길을 걷게 만든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기억해두고 싶은 뒷모습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5화낙엽이 먼저 앉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