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 있던 마음
어느 날.. 집 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책장에는 제자리를 잃은 책들이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읽지 못한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시간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낸 흔적이었고, 쌓여온 마음의 무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기 시작했을까?”
정리란 단순히 공간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풍경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하나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나의 오랜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기쁨도 있었고, 미련도 있었고, 이미 떠난 시간의 그림자도 있었다.
버리기 위해 손에 쥔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내 열정이 잠들어 있는 기억이었고, 어떤 것은 다시 펼쳐보지 못했던 다짐의 잔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서 놓아버리는 순간, 마음이 먼저 가벼워졌다. 마치 마음 한구석의 먼지를 털어내는 느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가지런히 제자리를 찾는 느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회복에 가깝다.”
물건을 비우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서서히 말을 거는 과정이었다. 무엇을 붙잡고 살았는지, 무엇을 내려놓지 못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숨 막히게 했는지를 조용히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내 삶도 이 책장과 다르지 않구나.’
내 마음에도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서랍이 있고, 귀찮다는 이유로 밀어두었던 감정의 조각들이 있고, 의도치 않게 켜켜이 쌓여버린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이 있었다.
비워낸 공간이 넓어질수록 내 마음속에도 작은 바람길이 생겼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여유처럼 삶에도 차분한 호흡이 만들어졌다. 비움은 단지 ‘물건이 줄었다’는 물리적 결과가 아니라 ‘삶에 틈이 생긴다’는 본질적인 변화였다.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오고, 오래 미뤄둔 꿈들이 들어오고, 한 번도 맞이하지 못한 나 자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만큼만 세상을 담을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을 때는 새로운 것을 맞이할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비움은 다짐과도 같았다. 앞으로의 시간을 더 가볍게 살기 위한 선택.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품고, 버릴 수 있는 것들은 과감히 내려놓겠다는 용기.
“비움을 통해 얻는 것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다음 시작을 위한 자리이다.”
정리해 보니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집 안의 물건처럼 마음속 짐들도 정리해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 몇 가지가 나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였다. 정리의 마지막 순간, 나는 조용히 방 안에 서 있었다. 여전히 책은 많았고, 물건도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의 위치가 명확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깨끗함이 아니다. 내 삶이 다시 중심을 찾았다는 증거였다.
비워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여백’이 아니라 ‘여유였다. 그리고 그 여유는 내가 나를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더 갖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비움의 순간마다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졌다. 정돈된 방 안에서, 나는 정리된 나를 발견했다. 가끔 우리는 삶의 큰 변화를 이루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항상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책 한 권을 제자리에 두는 일, 오래 묵은 종이를 버리는 일, 필요 없는 감정을 내려놓는 일…
그 작은 비움들이 모여 삶의 구조를 바꾼다. 그리고 그 깨끗해진 여백 위에 새로운 나의 이야기가 쓰이기 시작한다. 비움은 손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 순간부터 삶은 조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