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 판교로 이사를 왔고 적응이 쉽지 않았다. 모든 환경이 내가 살아온 리듬과 맞지 않는 곳이었다. 언젠가부터였는지 (어렴풋한 기억에 대학 1학년 때는 조정부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고 군대에서 여유가 좀 생긴 상병 병장 때부터였던 것 같다) 성공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군대에서 근무 중에 끄적거렸던 메모를 보면 5년 뒤, 10년 뒤 계획을 나름 세우고 경제적 독립을 목표에 두었었다. 22살이 뭘 알고 막연한 성공을 꿈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경제적 성공을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을 세팅했던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외대를 1년 다니고 나는 조정부 주장을 해야 한다며 난리를 치고 있었을 때, 군대는 앞으로 발목을 잡을 테니 최대한 빨리 다녀오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나는 친구들이 2학년을 시작한 3월에 해군으로 입대했다.
제대를 앞둔 시기에 부모님은 어학연수를 원하면 다녀오라는 제안을 주셨었다. 대학 생활하면서 동기들도 몇몇 어학연수도 가고 그러기에 나도 큰 의미 없이 몇 개월 어학연수를 다녀올까 하는 마음에 알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말년 휴가 나온 나에게 비자를 받으라고 하셨고 그렇게 나는 제대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보스턴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렇게 빨리 갈 마음은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마치고 있어 봤자 어영부영 시간만 간다며 입대시킨 부모님은, 아들이 제대를 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보내셨다. 물론 보내시면서는 마음 아파하시고 눈물도 흘리셨고, 아들이 허송세월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함을 그때도 지금도 알고 있고 이해한다.
그렇게 보스턴으로 어학연수를 간 나는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하루하루가 돈이었다. 어학연수 학원비용, 식비, 주거비 등등. 부모님이 지원해주는 이 비용들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웠고 나는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아깝지 않게 보내려 애썼다. 그렇게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로의 편입을 결정하고 합격했을 때에는 이미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 같다. 학비는 또 왜 그렇게 비싼 건지. 합격한 학교에서는 그 와중에 학비를 더 받으려고 하는지 한국에서 1년 다닌 학점을 하나도 인정해줄 수 없다고 했다.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해야 하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학비가 너무나도 부담이 됐다. 학점을 인정받으려고 입학처 사람들과 매일매일 찾아가 싸우고, 한국에서 받은 학점들에 대한 모든 내용을 번역하고 한국의 교수들에게도 레터를 받아오라는 억지에도 꾸역꾸역 다 받아내서 결국에는 1년 학점을 모두 인정받았다. 입학처 사람들도 그런 나를 징그러워했었는데 난 절실했던 것 같다. 그 시간과 비용에 대해.
그렇게 2학년부터 시작한 미국에서의 대학 시절도 효율적이어야만 했다.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야 했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고자 늘 그렇게 지냈다. 어차피 학점에 대한 학비는 정해져 있었고 내가 줄일 수 있는 비용은 미국에서의 체류 기간이었다. 체류기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다가 근처 전문대학에서도 학점이수를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두 학교를 다니며 나는 매 학기 40학점 가깝게 수업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같이 학교에 들어온 친구들보다 1년에서 1년 반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이미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아이템마저 정해져 있었으며 파트너들을 미국에서 모두 만났기에 졸업식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첫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업은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시작했기에 더 불안했고 불안정했다. 하루하루 성과를 내지 못하면 못할수록 내가 포기한 길로 간 친구들과 격차가 더 난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늘 어딘가 미팅을 하러 가도 최단 시간, 최소의 이동거리를 계산했고 하루에 있는 미팅들은 분단위로 쪼개 쓰려 애썼다.
군대에서는 성공을 위해 조급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치면, 제대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23살 때부터 조급하게 살았던 것 같다. 쫓기며 살았던 것 같다. 경쟁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학점,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나랑은 다르게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마음속 어디선가는 그들과 나를 비교했었던 것 같다. 사업을 하면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업하는 경쟁자들, 선배들, 친구들과 나를 비교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늘 채워지지 않았고 조급했다.
미팩토리를 매각하고는 내가 목표했던 경제적 독립도 이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잘된 만큼 나의 인맥도 더 넓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시야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룬지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보다 더 큰 금액에 회사를 매각한 친구들도, 큰 투자들을 유치해서 계속해서 기업가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소식은 나를 다시금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도 그들에게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었다. 미팩토리를 매각한 후에는 경제적인 것을 최우선에 두고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다시 그것을 쫓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근데 그 대상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었야 했는데, 내 모든 시선은 타인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판교에 와서 알았다. 정말 아닌 줄 알았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있었다. 정말 나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어떤 사람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가 선택했던 것들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스포츠 크림도, 돼지코팩도, 어니시도, 생활도감도, 오트루베까지도 기회가 있는 시장을 본 것이지 나 자신이 원하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데 시장에 없었기에 나는 그 일들을 했다. 그렇게 살아온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TV와 뉴스, 유투브와 인스타그램에서는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많은 돈을 보여주며 그것이 더 나은 삶인 것처럼 나를 속였고 나는 속았다. 사회가 만든 경제적으로 나뉘는 기준이 정답이 아니란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알면서도 이렇게 사는 게 편했던 것 같다. 깊게 사유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돈이 많으면 성공인 것처럼 규정한 사회에서 그 목표만 달성하면 되는 게임이 오히려 심플했다. 난 이미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졌고 중독됐던 것 같다.
판교에 처음 이사 와서 느낀 그 불편함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익숙했던 것들과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멈춰야만 했다. 나에 대해 깊게 사유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가 만든 성공의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이 만든 나만을 위한 성공 기준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해졌고, 평생을 살아온 관성과 같은 효율과 조급함에서 정을 떼야하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디톡스 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