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020년 마지막 날, 브런치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남긴 ‘위대해지지 않을 바에는 대충 살고 말 것이다’ 의 각오는 내가 하고 있는 일로도 향했다.
2020년 내내 다양하게 쌓인 진화의 경험들은 나에게 남겨져, 이전보다 나다운 나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내가 하는 일도 나답게 한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우리 회사가 처음 일으켜 타고 온 이 미디어커머스라는 파도는, 늘 시행 후 결과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이었다. 오늘 광고를 하면 내일 그 결과를 매출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브랜드들의 매출은 계속해서 광고하지 않으면 무너져 내렸고, 그것을 버티게 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광고를 만들어 매출을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단기적이고 얕고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인플루언서를 섭외해야 했고 광고비가 필요했다. 계속해서 인플루언서들이 끊기지 않고 우리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매달 그 수만큼의 인플루언서를 섭외하고 이를 위한 마케팅비가 필요했다.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잡지사에 광고비를 문의하면 잡지 한 지면에 광고를 올리는 데, 천만 원 가까이를 요구했다. 200페이지에 가까운 그 잡지의 모든 지면이 광고비를 내진 않을 텐데, 알려지지 않은 우리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선 또 그 비용이 들었다. 심지어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월간호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백화점에 입점한 우리 브랜드 제품, 오트루베 에어샤워가 편집샵 매장 바닥에 비치되어 있길래 , 제품을 매대 위에 올려줄 수 있냐고 묻자 추가적인 비용을 내거나 아니면 퇴점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소비자들에게 조금 더 노출이 잘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가치가 있어 보이게 매대에 올리는 것 마저도 매달 비용을 요구했다.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는 주지 못했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면 계속해서 비용이 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인플루언서들이 광고비를 받지 않아도 그들이 원해서 노출을 하고, 잡지사가 광고비를 받지 않아도 그들이 원해서 지면에 실어주는, 백화점에서 입점 요청을 먼저 해서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며 수수료마저 깎아주는 그런 브랜드들도 있다 세상에는.
분명한 건 내가 해오던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인플루언서들이, 잡지사들이, 백화점 등 오프라인 매장들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들이 원해서 전하도록 그들에게 돈이 아닌 그럴만한 가치를 쥐어 주어야 했다. 세상에 우리 브랜드의 이야기가 끊기지 않고 지속 가능하도록 구조를 바꿔야 했다. 내게 익숙한 모든 방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뜯어고쳐야 했다. 늘 매출을 만들어줘서 달콤했던 자극적인 마케팅 방식까지도.
그들에게 그들이 원할만한 명분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이제 필요한 건 그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할 우리만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오트루베를 판매할 때는 모든 것이 기능을 어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샤워 후에 바람이 나와 몸을 말려준다는 것. 얼마나 잘 말려지는지. 또 제품력을 입증하기 위해 시그니엘, 아난티와 같은 5성급 호텔과 리조트, 고급 골프장 사우나에서 쓰고 있음을 곁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은 순간에는 기능을 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고유해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끊기지 않고 계속 나오려면, 그 이야기는 나로부터 나와야만 했다. 당시 내 삶에서 가장 행복을 주었던 건, 집 앞 서울숲을 맨발로 걸을 때였다. 매번 가던 서울숲을 처음으로 맨발로 걸어본 날 나는 자연이 주는 그 에너지를 잊을 수 없었고, 그 후로는 꼭 서울숲을 맨발로 산책했다. 지나면서 눈으로만 봤던 나무들을 직접 만져보고 향을 맡아볼 때 느끼는 감정은 내가 살아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만들었다. 그 후론 여행을 가도 모든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려 노력했다. 우리 삶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커지던 시기였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연을 오감으로 느껴보기를 늘 권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바쁜 하루하루 안에서 그렇게 자연을 느끼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늘 여행을 떠나서든 한강을 가서든, 자연과 함께하고 싶어함이 느껴졌다. 자연을 늘 곁에 둘 수 있도록, 자연을 계속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를 가까운 지인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다시 본 에어샤워의 모양은 계곡에 가서 흔히 보았던 너른 바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에어샤워의 표면을 거칠게 만들어서 조금 더 바위처럼 표현한다면, 매일 아침저녁 샤워 후에 바위 위에 올라서 바람을 맞는 경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집 안에서도 자연을 들여 더 자주 느낄 수 있게 하다 보면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라도 진짜 자연으로 향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일 년 넘게 만들어 온 오트루베의 인지도를 내려놓고, 네이밍부터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세팅하겠다는 건 너무나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리뉴얼을 시작하면 우리 제품의 가장 성수기인 여름 시장도 리뉴얼 시기로 놓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다 바꾸지 않으면 위대해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마음을 먹고 리뉴얼 작업을 시작했다. 21년 1월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