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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Oct 15. 2017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 가까운'

인생 첫 부산국제영화제 소감문

낮에 피곤해서 이런저런 말을 쓰다 실은 제가 영화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장을 적었습니다.(https://www.instagram.com/p/BaOEEtcgcH_/) 오래 고민하고 쓴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영화관에 들어가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스크린에 쏘아지는 불빛들을 보며 그 말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직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저와 영화와의 관계를 글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지 했던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영화제로 내려와 있는 중이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릴 때 영화를 제대로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란 텔레비전이 아닌 영화관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정좌하고 본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모님은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십니다. 반기에 한 번 정도 영화관으로 가족 회동을 가는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것마저도 제가 다른 성원들을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자발적으로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왜인지 모르게 영화라는 매체와 별로 상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른 재미난 것들이 많았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저에게 영화란 원체험과는 별로 상관없는 종류의 경험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첫인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대학교 진학 이후였습니다. 막 친해졌지만 속내를 잘 모르겠는 대학 친구가 재미난 곳이 있다면서 데려간 곳이 낡고 먼지 쌓인 내가 났던 대전 아트시네마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지인들에게 종종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곤 했지요. 

영화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은 제게 늘 콤플렉스였습니다. 저에게 영화는 즐거운 취미라기보단 해치워야 하는 과제에 가까웠습니다. 시작이 늦은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봐야 한다는 강박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려서부터 영화라는 매체를 접해온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일 수도 있고 하루빨리 이 매력적인 장르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 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감독은 어떻고 이 영화는 실은 이렇게 볼 수 있다, 라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하루바삐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단 한 줌의 강제성을 띠게 된다면 이내 곧 부담이 되기 마련입니다. 저에게는 영화가 그랬습니다. 인지도 있는 영화,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는 돈을 지불하고 발품을 팔아서라도 기어이 보고야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이 항상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마냥 즐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백컨대 제 영화 평점들을 살펴보면 그 평균이 높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미 대중에게나 평단에게나 인정받은 작품들만을 보았으니까요. 반대로 말하자면 누가 재미없다고 말한 영화,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영화들은 일찌감치 리스트에서 제외했습니다. 어떤 의미를 건져낼 수 있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영화는 스크린에서 빛이 명멸하는 그 순간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의미 생산의 도구였던 셈입니다. 

지금은 남들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려는 시도를 그쳤습니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고(군대에서 함께 영화 리스트를 출력했던 친구와 저는 이제 약 300편 정도 차이가 납니다. 아트 시네마를 데리고 간 친구와는 약 천 편 정도 차이가 납니다.) 저 스스로도 특정 영화에 대해 수저를 얹는 정도의 글은 가능할지라도 영화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를 한창 보려 노력하던 시절 이동진 평론가의 팟캐스트를 즐겨들었습니다.(그게 책 팟캐스트였던 것도 돌이켜 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저에게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습니다. '한정은 부정이다.' 스피노자의 말이지요.(저는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도 따지고 저것도 따지는 걸더러 긍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 점은 좋아하고 이 점은 싫어하고 여기까지는 선호하지만 어디부터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를 대하는 제 태도가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영화는 훌륭하고 그래서 챙겨봐야 한다고 하는 한편 어떤 종류의 영화를 보는 건 시간 낭비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든 영화를 높게 평가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이 단일 영화를 평하기 앞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긍정하고 고민한다는 점입니다. 부족한 영화를 보는 일마저도 그들에게는 영화는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라는 걸 옆에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영화에 대해 글을 써보고, 그러다 결국 자기가 직접 나서서 만들기까지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저는 영화를 사랑한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아무리 열린 태도로 영화를 대한다 하더라도 득이 될만한 영화를 골라보는 습관은, 그 속에서 의미 생산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심보를 아주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영화는 아마 제 글에 자주 등장하는 소중한 이야기들의 선두에 서게 되는 정도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는 못 돼도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만나는 일이 조금 늦어 내 오랜 기억을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모습을 다 포용할 수는 없어도 함께 있는 동안은 즐거운 그런 친구 말입니다. 때로는 그 누구보다도 제 속내에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그런 친구 하나 곁에 있어주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겪어본 사람은 알 겁니다. 제 인생 첫 영화제 첫날의 마지막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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