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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Oct 23. 2017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이성복의 시 '아들에게'를 읽고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 하지 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아들에게', 이성복)


오늘 누군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인생에서 조언이 필요할 때 어디서 구하냐구요. 아마 일상에 쫓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모습이 안쓰러웠을 겁니다. 어쩌면 스스로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무어라 대답해줄 만큼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진 지금에야 질문에 대한 답을 쓰고 있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시입니다. 한 때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입니다. 오늘 이 시를 다시 펼쳐보는 이유는 그만큼 스스로가 다급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판을 두들기다 눈앞이 노래져 그만 노트북을 덮었습니다. 대신 시를 읽습니다.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제가 강론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시가 저에게 쥐어주는 한 줌의 깨달음을 사랑할 뿐입니다.제 한 몸 안락하게 뉘일 고향을 찾기보다 인생에 깊이 찔리라는 말은 세상을 그저 긍정하게 만들지도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삶이 고달플지라도 쉽게 게워내지 말고 한 번 더 깊게 찔리라는 말. 초연하기까지 한 이 담담한 절제가 지금 저에게는 너무나 힘이 됩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많은 활자를 읽고 있으면서도 시인들이 해준 말을 잊고 있었습니다. 세간의 기대는 버릴지라도 자존은 버리지 말라는 울음을 말입니다. 도서관 복도에 마른 기침이 낮게 울리고 누군가는 한 손에 책을 쥐고 잠든 이 시각에 시를 읽은 눈으로 할 일은 스스로를 연민하는 일이 아니라 내 옆의 누군가를 응시하는 일이란 걸 말입니다. 그게 고요한 詩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에게는 있습니까. 숨통이 트이는 글말입니다. 예,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사랑을 탐내는 만큼 인생은 견딜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당신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이 밤이 끝나면 당신에게도 고요한 시가 도착하리라 믿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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