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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Oct 28. 2017

그 사이로 난 길은 걸을만 했는지요.

기형도의 시 '10월'을 읽으며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10월' 중에서, 기형도)



2017년 10월은 모두에게 특별한 한 달이었을 겁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황금연휴로 기억되겠지요. 저에게도 스물여섯 살의 10월은 조금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절망을 하기에도 낙관을 하기에도 애매한 날들이었으니까요. 언젠가부터 저는 늘 제 나이를 헷갈려합니다. 난감한 일이지요. 여전히 사는 일은 어렵고 부지런히 지내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모자라 보입니다. 


기형도의 시는 그럴 때 읽기에 적격입니다. 그에게는 확신과 용기가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것이니까요. 그의 시에서는 초목마저도 쓰디쓴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이라니요. 낙하에 익숙한 것이 사람뿐만은 아닌가 봅니다. 


시의 화자는 자신이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 보고 있습니다. 절망이 삶의 전부였던 때를 말입니다. 지금이라고 '초라한 위기의 발목'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마는 적어도 한 가지 긍정은 할 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입니다. 부럽습니다. 제게도 그 비법을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시월의 절망이 채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지쳐 잠들어야 했던 그 하루하루를 사랑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 '그러나'처럼 질끈 깨문 어금니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시인의 절망이 저의 그것보다 옅기야 했겠습니까. 한번 믿어보는 것이지요. 


오늘은 저의 한때를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연휴의 마지막 날 썼던 글입니다. 두고두고 돌아보려 합니다. 어쩌면 내 지난 시월의 오솔길을 걸어보는 일이 절망을 긍정할 수 있게 된 시인의 비법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시월은 어땠는지요. 그 사이로 난 길은 걸을만 했는지요. 오는 11월이 너무 춥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휴가 끝나 가는데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연휴 동안 자리에 누워 앓기만 해야 했던 이의 못된 심보다정말이지 이번 연휴는 최악이다 싶을 만큼 지쳐있었다왜 쏟아지는 질문과 스트레스의 자리를 알고서도 피하지 못했을까나 빼고 모두가 연휴를 즐기는가 싶어 심란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긴긴 연휴 중에는 글 한 자도 쓰지 못했다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그렇게 괴로워했는데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찾아 헤매던 그 순간의 감정들은 그렇게 무색무취하지만 조금씩 숨을 조여 오는 산골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럼 이제 뭘 하려고 하니? OO이 되려고 하니이번 연휴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인데도 단 한 번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그걸 알면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대답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먼 사과만 이쑤시개로 찔러가며 겨우 삭혔다어쩌면 발화되지 못하고 내 안에 쌓인 숱한 단어들 때문에 병이 났나 싶을 정도다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하나교수님 입장에선 고작 몇 페이지짜리 과제에도 허덕이는 못난 학생이고 인사 담당자에겐 변변한 인턴 경험 한번 없이 나이만 먹은 게으른 지원자고 독자에겐 책 한번 제대로 엮어보지 못하고 자기 연민만 계속해서 뱉어내고 있는 덜떨어진 지망생인 것을마음 깊이 인상을 남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뒤에도 항상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이 나를 뒤따라 다닌다
  
애초에 인생 계획 같은 거 망한 지 오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대책 없는 말도 시효가 끝나가나 보다사람은 좋든 싫든 삶의 어느 순간에는 질문받는 자리에 서야 한다고나에게도 그때가 다가온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그렇다면 이번 연휴를 좀 덜 억울해해도 되는 것일까언젠가 서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리고 아직진짜 받기 싫은 질문은 남에게서 오는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되묻는 질문일 텐데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든 부딪칠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나는 그만큼 단단한 걸까나에게 그만한 재능과 끈기가 있을까이런 생각들을 할 때면 답을 내기 이전에 덜컥 겁부터 난다어찌해야 하나연휴가 짧은 게 아니라 매일의 밤이 짧다.(1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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