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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Jul 13. 2018

전과, 기억나세요?

그 전과(前科) 말고 전과(全科), 참고서 말이에요.




하루는 멍-하니 대형서점의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책들이 그리도 많던지. 눈에 잘 띄게 진열된 베스트셀러, 혹은 신간 몇 권을 뒤적이고 다니면서 나는 금세 익숙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주위의 삶들이 어찌나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 일종의 '환기'라고나 할까. 물론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을 하다가도 '세상 참 넓구나'라는 생각을 품곤 하지만, 서점은 확실히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함을 전해준다. 제목을 훑고 표지를 만지고 책장을 넘기는 물리적인 행위야말로 그 많은 책들을 직접 읽지 않더라도 지적 자극을 가능케 해주는 경험이라는 생각이다. 



어느새 나의 발길은 서점의 제법 안쪽까지 이어졌다. 고개를 올려 보니 '초중고 학습' 코너였다. 평소 같으면 눈길 한 번 머물지 않고 지나쳤을 그곳에서 그날따라 웬일인지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알록달록 참고서들의 종류 역시 너무나 다양한 걸 보고는 앞서 느꼈던 바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던 찰나였다. '전과'라고 쓰인 책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맙소사, 초등생 전과가 아직 있었구나- 정말 오랜만에 접한 그 단어에 나는 순식간에 어린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보다는 나중 세대입니다만.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전과(全科)가 필수였다. 

국민학생용 전과에서 초등학생용 전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변화 정도가 시대적인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달까. 아무튼 학년이 바뀌면 변치 않고 미리 사놓는 거의 유일한 참고서가 바로 전과였던 것이다.(그러고 보니 학기마다 샀던 것도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지금이야 전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각종 범죄나 사건, 흉악범 따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그 시절의 전과란 내게 있어 참고서를 뜻하는 거의 유일한 고유명사였다. 


전과를 살 때에도 물론 선택의 폭은 존재했다. 워낙에 시간이 흘러서 그 책의 표지며 느낌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지만, 분명히 각인돼 있는 딱 두 종류의 전과가 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바로 '동아전과'와 '표준전과'다. 이후로는 두산동아, 교학사로 더 익숙해진 출판사들의 바뀌기 전 이름을 본뜬 두 종류의 전과는 내 머릿속에 마치 짜장과 짬뽕처럼 나란히 붙어있다.       




원스어폰어타임


나는 매번 동아전과를 구입했던 기억이다. 

아니, 엄밀히는 엄마가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애초에 그걸 원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산 전과가 우연히 동아전과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동아'를 발음할 때의 둥글둥글한 느낌이 표준보다는 좀 더 부드러워서 선호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아무튼 내 선택의 기준은 그처럼 막연했고, 한 번 선택의 방향이 정해진 이후로는 어김없이 같은 선택을 하며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표준전과를 가진 친구를 보면 왠지 모를 거리감마저 느꼈던 기억이다.


요컨대 어린 시절의 선택이란 선택지의 단순함에 더해 내 기준의 막연함까지 뭉뚱그려져 그리 복잡할 것 없는 당연한 결정이었단 사실을, 바로 전과를 통해 기억해 냈다는 말이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다양한 참고서들 중 내게 맞는 걸 선택하느라 골치 아팠던 이후의 기억들에 비한다면 유년 시절의 단순함이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이던가. 나는 수학의 정석 하나만 보기에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주위에서는 '개념원리' 한 두 권을 뚝딱 해치우는 건 물론이고 별별 새로운 참고서들을 정복해 가는 모습에 괜히 애가 탔던 기억까지 떠오른다.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과거를 현재와 비교하는 건 애당초 무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유년기의 단순함과 비교해 현재 삶의 복잡함을 골치 아파하는 것 또한 좀 철없는 생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전과와 표준전과 시절을 그리워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너무나 다양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게 아닌, 단순한 선택 이후로 쭈욱 그것에 애착을 가질 수 있던 그 시절 나의 동아전과는 인터넷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야 했던 참고서가 아닌, 교과서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유일한 도우미라 고맙기만 했단 말이다.


아직까지도 초등학생용 전과가 나오는 줄은 몰랐기에 더욱 새삼스럽던 나의 추억 앓이는 서점을 벗어나며 어느새 또 잊혀지고 말았다. 그날 오후에도 나는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자 이 궁리 저 궁리하느라 바쁘게 보냈던 것이다.(광화문역 맛집을 검색했을 뿐인데도 장소 정보 '7,366건 더보기'라는 굉장한 결과 값을 얻어냈다) 하긴, 초코 아니면 일반(밀크), 그도 아니라면 믹스 선택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시대를 지나 수십 가지 플레이버에 토핑까지 고르는 시대가 된지도 벌써 한참 전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전과의 추억이니 선택의 단순함이 좋았다느니 늘어놓은 건 이미 촌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만.



* 전과에 대해 검색하던 중 그에 대해 잘 정리해 놓은 서울신문 기사를 발견하여 공유합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1001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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