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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Aug 21. 2018

꽃과 똥.

좋아지는 건 꽃이 아닌 나, 싫어지는 것도 똥이 아닌 나.




한 송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마음을 내면

꽃이 아닌, 내가 좋습니다.


법륜 스님의 말씀 중에 가장 좋아하는 글귀다. 

예전에 얼핏 강연 컨텐츠를 보다가 머리에 담아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접하고는 손글로 옮겨 쓰며 마음에 확실히 새겨 놓았다.


때로는 짧은 글이 길고 긴 연설보다 마음을 훨씬 더 울리는데, 이 경우가 참으로 그러했다. 나누어 봐야 위아래 두 줄 뿐인 글귀에 불과하지만, 그 너머의 모든 내용과 의미가 와 닿고도 남을 만큼 위 문장은 내 마음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스님의 맑고 높은 헤아림에는 턱없이 모자란 나인지라, '좋은(꽃)' 메시지에서도 '싫은(똥)'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해 내고야 만다.




으악


'꽃을 아끼고 사랑하면 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진다'는 향기로운 말을 한 번 뒤집어 보는 것이다. 거꾸로 하거나 비틀자는 얘기가 아니라, 반대의 경우를 떠올린다는 말이다.


'똥을 미워하고 싫어하면 똥이 아니라 내가 불행해집니다'

이래야 턱없는 비유일지언정 내 메시지의 의미도 단어처럼 확실히 풍겨질 듯하여 선택한 꽃의 반대말, 똥.

 

<예의 바른 사람에게 보답하는 법(가칭)> 과 같은 책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 서점가를 강타하는 이유는 바로 스님보다 나 같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꽃을 보며 흐뭇해하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똥을 피해 스스로를 지키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거라 생각하기에, 

나는 스님과 달리 꽃이 아닌 똥을 얘기한다.




주위를 보면 TV 속 연예인을 두고도 싫은 사람, 미운 사람만 입에 담고 사는 이들이 있는 반면 좋은 사람, 매력적인 사람을 늘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두 그룹으로 딱 갈라놓고 보면, 전자의 사람들이 자기 일로도 대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보이는 편이다. 관련 없는 사람도 미워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는 오죽하랴. '쟤 싫다'를 연발하는 사람 치고 인상 좋은 사람을 이제껏 못 봤다. 


멀리 갈 것 없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건만, 역시 나는 자신보다 남의 허물에 민감한 그저 그런(?) 사람인지라 타인들을 일반화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아무래도 편하다. 굳이 변명하자면 스님조차도 때로는 자신의 경험이나 자기 성찰이 아니라 '남들 얘기'를 예로 들어 설법을 펼쳐야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지 않은가.


하등 관계 없는 연예인을 두고 때론 얼굴까지 붉히며 열을 내도록 만드는 마음의 방향. 

이는 사적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도 예외일 리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문제가 되어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에 자기계발/비즈니스 서적 코너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코칭서들이 즐비한 것일 테다.  


그대가 굴리는 게 똥인줄은 아는가




그래, 남 얘기는 그만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요즘도 층간 소음 때문에 위층 사람들이 싫고, 새로운 비즈니스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때때로 밉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를 향해서도 불쑥불쑥 밉고 싫은 감정이 일어나는 걸 보면 '나도 참 여전하구나' 싶을 지경이다. 


돌이켜 보면 타인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스트레스는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전제하지 않는 이상 내가 싫어했던 그(녀)는 내 기준에서 정상이 아닐 수밖에 없었고, 이를 정상의 범주에서만 끙끙대던 나로서는 완전히 극복해 낼 재간이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위안을 삼자면 어릴 때에 비해 커서는 그 미움과 싫음의 지속이 짧아진 데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정도도 덜해졌다는 사실! 이는 누군가를 미워해 봤자 당사자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나만 괴로웠던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얻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어떤 거창한 깨달음이나 실천적 노력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순간순간 나 자신만을 위해 

눈 앞의 똥에 무뎌지는 한편 다른 편 꽃들을 향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했을 뿐. 


어라




꽃을 좋아하는 마음만 얘기한 스님의 좋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나는 기껏 똥에 대해서나 주절거리고 나니 슬슬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꽃 같다'의 반대 의미로 쉽게 여겨지는 'X 같다'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데 똥 정도면 좀 어떠한가 싶은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문득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떠오른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또라이가 한 명도 없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 또라이인 거라는 명쾌한 법칙 말이다. 여전히 주위에 많은 똥(또라이)이 보여서 그게 싫다는 마음도 생기는 걸 보면, 나는 아직 똥은 아니구나 싶은 위안을 얻으려는 의식의 흐름 같기도.


어쨌거나 스님의 말씀대로 나 자신을 더 아끼기 위해서라도 꽃만 좋아하고 마음을 내는 하루하루이고 싶다. 

똥을 미워하느라 허비할 시간이 점점 더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좋아하고 또 좋아하느라 어느새 주위의 똥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건 해탈의 경지와 동시에 실은 나 자신이 똥임을 깨닫는 순간이 될까?


꽃에서 똥으로 이어진 개똥철학을 담은 글이 실은 불교의 해탈과 맞닿아 있지 않을는지 감히 지껄인 똥 같은 결론입니다만, 꽃 같은 마음으로 졸고를 미워하지는 말아주시길.


꽃이든 똥이든, 보는 건 결국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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