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
늘 그렇듯이 일부러 최소한의 사전 정보에 머문 채 영화관에 들어섰다. 감독 추상미의 첫 장편 영화이자 부산국제영화제 전 회차 매진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이 가는 영화였다.
알고 보니 이 영화, 감독이 극 영화 '그루터기들'을 기획하는 과정에서의 취재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일종의 프리뷰 방식의 이야기 구성이랄까. 영화의 초반, 추상미 감독은 자신이 왜 이 시나리오(다큐가 아닌 향후 극영화로 제작할)를 기획하게 됐는지부터 설명한다. 유산과 산후우울증을 겪다 보니 첫 아이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강해졌고, 그러다 우연히 접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북한 꽃제비 아이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루터기들'의 조,단역 오디션을 통해 탈북 출신 배우 지망생들을 뽑는 과정이 나타나며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다름 아닌 남과 북, 우리 민족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앞서 밝혔듯 사전 정보가 없던 나로서는 초반에 이렇게 진행되다가 이어서 오디션에 뽑힌 배우들의 극이 전개되리란 잘못된 예상을 하면서도 점점 다큐에 빠져들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79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고 취재 과정의 드라마를 적절히 혼합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추상미 감독이 탈북민 이 송과 폴란드에서 동행하며 과거의 흔적을 좇는 모습이 사실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졌다.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가 밝혀내는 역사적 사실은 폴란드로 갔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고아들을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에 위탁했고 이들 중 폴란드로 보내진 1천5백여 명에 대한 기록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이들에 대한 기록은 이미 폴란드의 언론인 욜란타 크리소바타에 의해 ‘천사의 날개’라는 제목으로 소설화되었고, 아이들 중 한 명의 이름인 '김귀덕'을 제목으로 하는 폴란드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도 방영된 적이 있기에 이 영화는 그 작품들을 근거로 삼는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그 안의 사연에 감동이 담기지 않았을 리 없다. 취재를 위한 르포가 아닌, 남한의 감독과 북한 출신 배우(지망생)의 동행이라는 기획에서부터 이 영화는 이미 드라마다. 20대 탈북 여성(이송)이 자신의 마음속 상처와 맞닿은 역사의 아픔과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위로하는 남한의 여성(추상미)도 결코 관찰자는 아니다. 그녀 또한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더욱 공감한 역사적 비극을 대중에게 작품으로 내놓으며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것이다.
다만 그러다 보니 영화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두 여인의 소통은 날 것 그대로의 다큐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작위적이라거나 억지라는 느낌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독립 영화나 단편작이 아닐 바에야 그 정도 요소들까지 배제했다면 감독은 오히려 긴 호흡의 연출과 소재 선택에 대한 지적을 받았을 것이다. 프와코비체(아이들이 보내졌던 양육시설이 위치한 폴란드의 시골 마을)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영화성의 획득을 위해 감독이 최소한의 연출을 보탠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덧붙여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크게 감동했던 순간은 유제프 보로비에츠 당시 양육원 원장의 인터뷰 때였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는 당시(1950년대)에 보육 교사였던 현지 노인들의 인터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들이 과거 북한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모습이야말로 앞서 내가 언급한 역사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를 뛰어넘는 진실한 감동을 가능케 했다.
추상미 감독은 원래 다큐 계획은 없었으나 이분들의 연로한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직접 취재한 연출가로서 당연히 그러했으리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폴란드 교사들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원조나 동정의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모습과, 한국 전쟁 뒤 평양의 모습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자료화면과 내레이션이 기억에 남는다.
전쟁을 겪었기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던 폴란드의 교사들은 머리 까만 아이들을 마치 제 자식처럼 대했고, 아이들은 그들을 파파, 마마라 부르며 진심으로 따랐다. 반 세기도 지난 지금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노인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의 아픔은 현재의 관객들에게 생생히 전달되었다. 내 볼에서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 결코 그들의 온도와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허구가 아닌 진실에 공감하며 눈물 흘릴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러한 다큐 영화의 온기가 갖는 의의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