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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이십끼_1

여행하지 않고 제주에서 지내기 1편_다시 찾은 제주

by 차돌


올해도 어김없이 제주를 찾았다. 한 달을 살아본 나로서는 웬만큼 지내다 오지 않으면 짧게 느껴지는 제주 여행. 이번 방문은 그러나 기간보다 목적에 있어서 또 한 번 특별했다. 제주는 갈 때마다 새롭다느니 하는 진부한 찬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여행으로 간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머물기 위해' 제주에 다녀온 것이다. 목적지도 렌터카도 없이, 애월 부근의 숙소에서 스무 끼 정도를 먹을 만큼만 지내다 왔다.


비행기와 숙소 모두 출발 이틀 전에 충동적으로 예약했다. 마감을 앞둔 원고가 있었는데 주변 환경이 따라주질 않아 불만이 그득하던 참이었다. 핑계는 접고 일상에 집중하리라 마음을 다잡으려 할수록 떠나야 할 이유가 머릿속에 늘어만 갔다. 때마침 검색한 왕복 비행기표 가격이 약 7만 원(그것도 둘 다 아시아나), 애월 바다가 보이는 널찍한 방이 하루에 약 3만 원(에어비앤비에서)인 걸 찾아낸 나는 결국 유혹을 참지 못했다.


걷다가 벌써 지쳐서 돌아본 제주공항


제주 공항 게이트를 나오면 줄줄이 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공항을 나서자마자 렌터카를 인수했거나, 법이 바뀐 뒤로는 렌터카 업체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타러 주차장으로 직행하느라 버스를 탈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애초에 렌터카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차가 있으면 분명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 원고 작업이고 뭐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게 뻔했다. 해서 아예 렌터카 비용은 예산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까지 버스를 타야만 했던 것이다.


제주 공항버스 정류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노선도 워낙 많아 내가 타야 할 버스 번호가 뭔지도 헷갈렸다. 어차피 거기서 타봤자 금방 202번 버스로 갈아타야 애월리로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럴 바엔 202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배낭을 메고 캐리어 하나를 끌며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살짝 후회스럽긴 했다. 이미 날은 더웠고 가야 할 길은 꽤 멀었다. 네이버 지도와 다음 지도의 정류장 정보도 달랐다. 인적 드문 경사로에는 렌터카 업체 몇 군데가 있었다. 돌아보는 순간 온몸이 돌로 굳는다는 어느 그리스-로마 신화가 떠올랐다. 다행히 잘 참고 걷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제주 공항 인근(1km는 넘게 떨어진) 202번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땀을 식혔다. 서울과는 달리 어플에 뜨는 버스 정보와 실제가 도통 맞지 않았다. 미리 받아놓은 제주버스 앱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현장의 전광판 정보마저 오락가락했다. 몇 해 전 제주에서 처음 버스를 타며 깨달았던 그대로였다. 그러려니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어차피 올 버스였다.




숙소 가격과 입지가 우선이라 건물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만(딱히 외관이 나쁘단 건 아니고)


호스트 아주머니가 버스 정류장에 마중을 나와주셨다. 숙소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처음이라 길을 잘 모를 수 있다며 차를 태워 주신 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래된 펜션 건물의 방 몇 개를 임대 관리하는 분이었다. 에어비앤비에는 따님이 정보를 올려놓은 거라 내가 파악한 정보와 아주머님의 생각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덕분에 오히려 예약한 것보다 큰 방을 제공받았다. 운이 좋았다.


애월 바다가 보이는 거실, 창이 두 방향으로 난 침실, 숲이 보이는 부엌 옆 베란다


기대 이하였던 낡은 시설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으로 널찍하고 조용한 숙소라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양쪽의 바다와 숲 모두를 큰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았다. 비수기가 아니었다면 쉽게 얻지 못했을 독채였다. 거실에는 책상과 의자도 있어서 이래저래 최적의 작업환경(?)으로 여길 만했다.


내륙에서 애월항으로 이어진 숙소 앞 도로


첫날의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멀지 않은 곳에 농협 하나로 마트가 있어서 바람도 쐴 겸 그리로 향했다. 선선한 제주의 저녁 공기가 반가웠다. 아직은 저녁이면 바람막이를 걸쳐야 하는 5말 6초 무렵이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장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당장 먹을 저녁거리와 다음 날 아침을 위한 빵과 샐러드 등을 샀다. 식용유와 간장, 계란은 파는 것 중에 제일 작은 사이즈로 하나씩 사놓았다. 지내는 동안 남김없이 다 먹을 생각이었다.(결국 식용유와 간장은 반 이상 남겨 놓고 왔다) 물과 우유, 새로 나온 맥주 한 병과 라임 맥주 한 캔도 마실 거리로 함께 샀다.



장 볼 때 가장 먼저 고른 게 바로 부침용 두부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두부를 튀겨서 먹고 싶었다. 마트에 가니까 배가 더 고파져서 계획에 없던 비엔나 소시지도 집어 들었다. 두부에 곁들인 소시지는 생각보다 조합이 좋았다.



두부는 전부 튀기지 않고 생두부를 조금 남겨뒀다. 마트에서 작은 팩으로 파는 볶음 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라임 맥주가 그런대로 식사와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방이 너무 조용해서 TV로 뉴스를 틀어놓고 먹었다. 밖이 어두워서 더 이상 바다와 숲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졸지에 독거 청년이 된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썩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병맥주 하나를 더 마실까 하다가 결국 그건 참아냈다. 첫날부터 그러면 아무래도 놀러 온 놈이 돼버릴 것 같았다. 이제 겨우 한 끼를 먹었을 뿐이었다.


* 매 끼를 쓸 생각은 없고, 의미 있던 몇 끼만 앞으로 더 끄적일 생각입니다. 끼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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