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고 제주에서 지내기 2편_계획한 산책과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만 하고 숙소를 나섰다. 아침부터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길래 썬크림을 바르고 썬글라스도 꼈다. 통풍이 잘 되는 트레이닝복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여 덥진 않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애월항을 향해 걸어갔다. 숙소에서 십 분이면 닿는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느라 이십 분은 족히 걸렸다. 큰길을 하나 건너고 돌담길 골목 틈으로 조금 들어서자 애월읍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판마다 '애월○○'라는 점포명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애월항은 바다를 조그맣게 감싸고 있는 작은 항구였다. 문득 여수항이 떠올랐다. '여수 밤바다'를 듣고 넓은 해안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담해서 놀랐던 기억이었다. 인근의 한담 해변이나 곽지 해수욕장의 너른 풍경을 떠올리다가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조깅할 만한 코스는 아니지 싶었다. 마침 대대적인 배관 공사인지 뭔지(LNG시설 공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를 하느라 등대 가는 길마저 통제돼 있어 쓱 둘러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실망한 게 아니라 뛰기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지도를 보니 동쪽으로 가까이에 애월 근린공원이 있었다. 언덕길을 조금 걸어 애월 도서관을 지나자 예상했던 것과 또 다른 풍경이 보였다. 나무와 산책로가 있는 일반적인 공원이 아니었다. 우선 잔디가 깔린 푸른 축구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로는 하얀 동심원이 여러 개 그어진 육상 트랙이 빠알갛게 빛났다. 그 너머로는 파란 하늘 아래 더 짚은 파랑의 바닷가가 내려다 보여서 아주 근사한 공원이었다.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각자 트랙을 걷거나 뜀박질을 하는 중이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트랙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으나 역시 몸이 가볍지 않았다. 운동 좀 하던 시기에는 발을 디딜 때마다 가슴 근육이 적당히 통통거려서 좋았는데, 이제는 그저 뱃살만 촐랑촐랑거려서 배에 힘을 잔뜩 줬다. 덕분에 더욱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두 바퀴째부터는 속도를 더욱 줄이고 호흡에 집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글쓰기와 달리기를 그토록 연결 짓는지 조금 더 알듯했다. 둘 다 군살을 빼면 잘할 수 있는 작업인 동시에 군살을 빼기 위해서도 좋은 습관인 것이다. '집 앞에 이런 운동장만 있다면 매일 아침 조깅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빨래 걸이가 된 집 안의 운동 기구가 떠올랐다. 하루키라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 뭐 이런 상상을 하며 서너 바퀴를 돌자 땀이 흘러서 한 바퀴는 그냥 천천히 걸었다. 첫날부터 괜히 오버해서 좋을 게 없었다.
어느덧 한 시간도 넘게 지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해가 더 쨍쨍했다. 어젯밤에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야자수가 있는 펜션 건물이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제법 근사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어제 사놓은 샐러드와 빵을 먹었다. 햄과 케첩 양념이 적당한 작은 피자빵이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계란 후라이도 하나 해서 꿀떡 삼켰다. '아침을 상쾌하게 여는' 멜* DJ 추천 리스트 음악을 들으며 집에서 챙겨 온 드립백 커피 하나를 내려서 마셨다. 리조트에서 보내는 아침 못지않은 시간이었다.
도착 날 미처 못 챙긴 물품을 요청하느라 호스트분께 연락했다. 아주머니는 마침 본인이 관리하는 바닷가의 다른 숙소에 갈 일이 있다고, 나도 함께 가서 보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괜찮다면 방을 바꿔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친절하게 말씀하시기에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결국 기간 내내 방을 바꾸진 않았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차를 타고 가서 하귀-애월 해안도로 인근의 펜션을 구경했다. 전망은 좋았으나 거실이 좁고 천장도 낮아서 나는 원래의 방에서 지내는 게 더 좋다고 말씀드렸다.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동을 해서 바닷가를 보니 여행 기분이 다 났다. 아주머니는 나온 김에 근처도 한 번 구경시켜주겠다며 '새물'이라는 곳을 안내해 주셨다. 옛날부터 식수원으로 이용되던 해안 용수 지형으로,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 그냥 마셔도 된다는 계곡 같은 곳이었다. 과연 작은 풀장 같은 동굴 주위로 물이 아주 깨끗하고 맑았다. 한 모금 마셔보니 바다 짠내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제주 여행을 할 때 해안 도로를 오며 가며 자주 지나다녔는데 그런 장소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렇게 시간을 휘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서 더는 여행 기분에 취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루면 점점 하기 싫어질 것 같아서 일단 노트북을 꺼내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되든 안 되든 제법 하다가 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바닥이 좀 버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날은 침대에서 잠만 자느라 몰랐는데 방과 부엌 바닥에도 먼지가 있었다. 한동안 손님이 머물지 않던 숙소인 듯했다. 건물 창고에서 대걸레를 찾아 거실과 방을 청소했다. 집에서는 하지도 않던 청소를 알아서 다 하는 거였다. 일은 하기 싫고, 시간은 많고, 혼자서 잘 지내기는 해야겠어서 그랬나 보다. 꼼꼼하게 한 건 아니고 앞으로 지내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로 보이는 곳들만 닦았다.
몸을 움직이니 역시 배가 고팠다. 집에서 미리 챙겨 온 치즈 함박스테이크 간편식 하나를 렌지에 돌렸다. 계란은 이번에는 스크램블을 해서 먹었다. 다행히 어제 먹다 남은 볶음 김치가 있어서 느끼한 맛을 잡아줬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설거지를 한 뒤 책상 앞에 않으려니 졸음이 밀려왔다. 잠시 뒤 결국 자리를 잡고 한바탕 잠을 자버렸다. 앞 뒤로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서 시원한 낮잠이었다. 제주에 도착한 뒤로 생각보다 후딱 세 끼를 해 치운 시간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