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고 제주에서 지내기 4편_붕 뜬 마음과, 남은 끼니
다시 혼자가 된 아침에는 그 전까지의 날들보다 오래도록 걸었다. 친구와 함께 버스 타고 갔던 길을 내리 걸어한담 해변까지 다녀온 것이다. 어느덧 열 끼니를 넘겨 제주에서의 일주일도 후반에 이른 무렵이었다. 홀로 지내며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려던 계획이 틀어져서였는지 내 생활의 리듬은 어느새 다시 들떠 있었다. 방에 있으려니 바다가 자꾸 부르는 듯했고, 커피를 직접 내리려니 문득 제주 해안의 풍경 좋은 카페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잔뜩 바깥바람이나 쐬며 남은 끼니들을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을 발견했다. 대강 해 먹을 밥과 반찬이 아직 남아있었으나 빵집을 그냥 지나치려니 섭섭했다. 한두 끼니를 대체할 요량으로 입맛에 당기는 걸로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샌드위치는 책을 읽으며 간단히 먹기에 좋았고, 달콤한 잼과 크림이 발라진 빵은 다시 원고 쓰기에 몰두하는 중간에 간식삼기에 훌륭했다. 붕 떴던 마음이 빵 몇 개로 간단히 진정될 리는 없었지만 그저 내키는 대로 먹으니까 또 그런대로 몸과 마음이 단순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후 날씨는 더욱 청명했다. 일주일의 모토를 '여행하지 않고 제주에서 지내기'로 잡았는데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렌터카만 없앤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반나절을 산책하고 온 뒤로도 나는 또 밖에 나가고 싶었다. 하던 일이 그리 절박하지 않아서, 집중력이 터무니없이 나빠서 등등 이유를 대자면 여러 개가 있을 테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그 이유들이야말로 당시에 완성한 내 빈약한 원고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후회스럽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다 쉬어버린 밥을 두고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일만큼이나 무의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당시의 스무 끼만큼은 그때그때 먹고 싶은 걸 찾아 만족했고, 끼니의 사이에는 다음 끼니를 걱정하지 않은 채 마음껏 바람을 쐬거나 멍을 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는 역시나 이제 와서 보니 일상에서 그리 간단치 않은 일들인지라, 그 어떤 휴가 기간이나 여행보다 소중한 일주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넣어놓은 게 별로 없음에도 며칠 새 들락날락한 재료들 때문에 냉장고 안이 어수선했다. 햄, 삼겹살, 달걀과 같은 잔반들을 그러 모아 조리하고 즉석밥을 데우니 간소하면서도 제법 든든했다. 다만 전날 비슷한 메뉴로 둘이 함께 식사했을 때보다는 맛이 덜했다. 누가 보면 무인도에라도 며칠 다녀온 사람의 푸념 같으려나. 어떤 사정에서든 늘 혼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투정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작정하고 혼자 먹던 밥이 친밀한 이와 함께 먹던 밥의 특별함에 비해 심심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후로도 제주에서 나의 끼니는 단출하면서도 특별했다. 마트 내 작은 반찬 코너에서 반갑게 발견한 진미채의 새콤달콤한 맛이, 미리 챙겨가 놓고는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데워 먹은 인스턴트 카레의 짭조름한 맛이 매 끼니를 특별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스무 끼 가량을 소박하게 채워가며 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무렵이었다. 일주일이 거의 끝나감에도 쓰던 원고가 여전한 듯하여 답답해하고 있을 즈음, 나는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창 밖을 보다가 어떤 풍경을 발견했다. 실은 그 풍경이야말로 내가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으려던 이 일주일을 '끼니'로 회상하며 졸고로나마 남기고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별 볼 일 없는 혼밥 사진들은 이쯤에서 끝내고 다음에는 그래서 그에 대해 마지막으로 쓰며 '제주에서의 이십끼'를 매듭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