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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Jan 11. 2023

미괄식 인간

결론은 나중에.



뒤의 내용부터 앞에 쓰는 게 좋겠어요.
그래서 결론이 뭐죠?
이메일이나 보고서는 두괄식으로 쓰도록 해요.



  사회 초년생 무렵 종종 듣던 말이다. 학회니 인턴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를 두다 부랴부랴 취업했던 나. 어쨌든 분량만 뽑아내면 되던 대학 리포트와 달리 회사의 업무 보고서는 명확하고 간결해야만 한다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과정보다 결과가, 진단보다 해결책이 중요했을 직장 상사들이 보기에 나는 말랑한 애송이였을 거다.





  어려서 도시락 반찬을 먹을 때도 나는 맛있는 건 아껴뒀다 나중에 먹곤 했다. 덜 맛있는 것들로 허기를 슬슬 달래다 식사 후반에 고이 먹는 메인 디쉬의 꿀맛이 좋았다. 그러다 보면 맛있는 자기 반찬부터 허겁지겁 해치운 녀석들이 내 반찬에 손대는 일도 잦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냉큼 맛있는 것부터 먹는 건 영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거, 좋아하는 걸 아껴두었다 나중에 쓰려는 성향은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서두에 결론부터 빵 때려놓고 시작하는 글은 좀처럼 쓰질 못한다. '기-승-전-결'의 틀 안에서 주제 의식을 서서히 고조하다가 마지막에 정리하는 미괄식 구조에 익숙한 것이다.




  물론 글쓰기든 무엇이든 처음부터 명료해야만 남들의 주목을 끌기 쉽다. 속전속결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미괄식보다 두괄식 구조가 효율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도시락 반찬만 해도 맛있는 것부터 해치우는 녀석들이 남의 반찬까지 더 먹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자 드디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다가왔다. 누가 뭐래도 난 미괄식 인간이다. 결론부터 말하고 쓰느라 억지 노력을 기울이는 건 철저히 비즈니스 영역 안에서만이다. 이마저도 타고난 두괄식 인간들에 비할 바 아니므로 상대적으로 나는 비효율적인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 가지 또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압박 상태보다는 마음 평온한 상태에서의 일처리나 글쓰기가 더 나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 나 같은 미괄식 인간이 두괄식 구조를 강요받다 보면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럴 바엔 차라리 느리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매끄럽게 완수하게 하는 편이 시간을 덜 잡아먹는 경우가 있으니, 이야말로 비효율의 효율이라 할 만하다. 


급하면 뒤부터 보시죠.


  그 시절 나의 상사들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그들의 사정이 있었듯 내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었다. 두괄식 인간이 드글드글한 세상에서 미괄식 인간은 오늘도 이렇게 태평한 소리다. 효율과 성취가 중요하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나대로 느긋하게 증명해 나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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