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2

- 맥주와 꼬치

by 차돌


J는 작은 술집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모습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과 묘한 이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퇴근 후 직장인들의 풍경이 대개 그렇다. 회사를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저마다의 피로와 고민을 가득 안고 있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J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 일찍 왔네? 오랜만이다.”


가게로 들어서는 나를 J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게 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어?"

"그렇지 뭐. 배고프지? 일단 뭐 좀 시킬까?"

"그래 그래. 여긴 나도 처음인데, 뭐가 좋을까?"


메뉴판을 살피면서 내가 말했다. 처음 방문한 술집에서 메뉴를 고르는 일이란 모처럼 만난 친구와의 인사말 이상으로 신중한 법이다.


"너 오기 전에 봤는데, 여기 꼬치가 맛있을 것 같아. 모둠으로 시킬까 일단?"


넘겼던 페이지를 다시 들추며 고민하는 나를 보더니 J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좋지. 그러고 보니 우리 대학교 때 꼬치요릿집 자주 갔잖아, 싸고 괜찮은 데. 여기 꼬치 세 개 값이면 거기선 모둠이었는데, 하하.”


모둠 꼬치를 통해 공통의 추억을 먼저 소환한 건 나였다.


"기억하지 당연히. K랑 셋이서 자주 갔고 너랑 나랑 둘이서도 몇 번 갔잖아. 아직도 학교 앞에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주머니 여기 주문이요!”


J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생맥주 두 잔과 안주를 주문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난 식사가 될 만한 메뉴를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의견을 뒤집으면서까지 메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캬, 맥주 시원하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너 회사 강남역 근처에 있지 않았나?"


빈 속에 들이킨 생맥주의 얼얼함을 느끼며 J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용건도 없이 그가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물을 거라면 일찌감치 물어보는 게 낫다. 중요한 이야기는 감춘 채 겉도는 대화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건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이 근처에 올 일이 있었어. 그리고 나 회사는 그만뒀어.”


마시던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J가 대답했다.


"뭐? 잘 다니더니 왜 갑자기 그만뒀어, 언제?"

"잘 다니긴. 말을 안 해서 그랬지 너무 힘들었다고."


꼬치에서 염통을 쭉 잡아당기며 답하던 J는 이내 입을 닫았다. 예전부터 자기 이야기를 할 때면 뜸을 들이는 그였다. 나는 앞에 놓인 꼬치들을 잡고 내용물을 젓가락으로 쭉 빼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토마토베이컨, 마늘, 은행… 하나하나 그릇에 옮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J는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크~ 진짜 시원하네. 그런데 너 오늘 나 만난다고 와이프한테 말은 했냐?”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대신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냥 늦게 들어간다고 메시지 보내 놓았지 뭐. 읽었으려나 모르겠다. 아침에 대판 싸우고 나왔거든. 나한테 화가 단단히 나 있을 거야"

"그러냐. 넌 안 싸울 줄 알았는데,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나 보네.”

"하하, 말도 마라. 넌 결혼 생각은 없냐 아직? 전에 사귀던 여자랑은 잘 만나고 있고?"

“누구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 지금은 만나는 사람 없어.”


막상 내 이야기를 하고 보니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 나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미혼인 J는 해마다 여자친구가 바뀌었고, 자기의 연애담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편이었다. 그런 녀석이 또 한 번 말을 아끼는 모습에 나는 그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추궁하듯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말을 아끼고 맥주를 마실 뿐이었다.


"클라이언트는 시도 때도 없이 쪼아대지, 팀장은 매일 닦달하지. 어휴, 내가 그런 데를 5년이나 다녔다니."

잠시 뒤 J가 다시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녀석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회사가 다 그렇지 뭐. 그런데 벌써 5년이나 됐나? 다른 데로 이직한 거야?"

"아니, 계획은 없어 아직."

“아 그래... 야, 아무튼 잘 됐다. 싫은 회사에 억지로 다닐 필요는 없지. 우리도 MZ 아니냐, 하하. 퇴사를 다 하고 부럽네 부러워."

"부럽긴, 못 버틴 건데 뭘…”


그제야 나는 J의 얼굴 가득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위로해 줄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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