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3

- 실은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by 차돌


우리는 맥주를 더 마시며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공통의 화제라고는 함께 어울렸던 대학 시절의 이야기뿐이었다. 졸업 이후로는 J와 단 둘이 만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창들과의 모임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웃고 떠드는 사이, 딱 그 정도가 우리의 관계였다. 이만큼 회포를 풀었으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무렵이었다.


“배도 부른데 소주 한 잔 할래? 국물 메뉴 하나만 더 시켜서.”


빈 맥주잔을 응시하던 J가 말을 꺼냈다.


“아, 그럴까? 소주는 뭘로 할래?”


뜻밖의 제안에 놀랐지만 거절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 역시 술이 충분하지는 않았던 데다 친구와의 술자리를 파하기에는 야박한 시각이었던 것이다.


"이번엔 네가 골라. 아까는 내가 시켰잖아.”


내게 메뉴판을 건네며 그가 말했다. 어딘지 조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자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뭘 그리 망설였을까. 나란 인간은 언제까지 상대방에게 맞추며 살아갈까.’

스트레스가 많을 때면 시시때때로 자책과 망상에 빠지는 법이다. 그날의 내가 딱 그랬다. 친구가 눈앞에서 떠들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나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오뎅탕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J는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를 한 잔 두 잔 따라 마셨다. 애초에 소주가 마시고 싶던 모양이었다. 나 또한 한 잔 가득 따른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뜨뜻하고 알싸한 알코올이 금세 온몸으로 번졌다. 맥주와 소주의 완전히 다른 맛처럼 술자리 분위기도 바뀌어가는 듯했다.


대화는 대학 시절의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로 이어졌다. 주로 이야기를 잇는 건 J였다. 소주를 오뎅탕 국물처럼 홀짝홀짝 마시는 그를 따라 잔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 구석에는 빈 소주병 3개가 놓여 있었다.


4병째의 소주를 기다리며 J는 드디어 말을 멈췄다. 일순간 라디오가 뚝 꺼진 듯한 적막이 흘렀다. 나는 어묵을 간장에 찍으며 맞은편에 앉은 녀석을 바라봤다. 그는 자기 앞의 소주잔을 엄지와 검지로 쥔 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술을 모아 오므린 얼굴이 대학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홀로 깊게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나는 결국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남의 고민 같은 걸 듣고 싶은 날은 아니었지만 그런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것이다. 그는 대답을 뱉는 대신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직은 정해진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다시 한번 내가 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도돌이표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우리는 앞날을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꿈꾸던 앞날이 현재가 된 지금에 와서는 정작 그때를 회상하느라 바쁘다는 건 이상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로 술자리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살고는 봐야겠다."


억지웃음을 보이며 J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살고 보다니?”


내가 그에게 되묻던 그때, 우리 테이블 옆으로 남녀 한 쌍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지금처럼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소주 주문하시면 선물을 드리고 있는데, 혹시 참여하시겠어요?”


한 명은 소주 회사 로고가 큼직하게 붙은 옷을 입은 여자였고, 한 명은 캐주얼 복장의 남자였다.

‘아직도 이런 홍보를 하네, 옛날에도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예전 기억을 또 떠올리는 나였다.


"선물이 뭔데요?”

"아, 손소독제랑 물티슈를 드리고 있어요."

“아니 그런 게 다예요?”


J가 그들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남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봤다.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시키면 안 시키는 거지 선물이 그게 다냐며 되묻는 건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 저흰 이미 많이 마셨어요. 괜찮습니다.”


나는 우리 테이블의 소주병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여자가 끌고 가는 캐리어에는 손소독제와 물티슈가 가득했다. 포장 비닐마다 인기 걸그룹 멤버가 활짝 미소 짓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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