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by 차돌

SNS에는 '선 넘는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이 넘쳐난다. 단호하게 선을 그어라, 되묻는 질문으로 상대의 무례를 상기시켜라, 같이 웃어주지 말고 침묵하라 등등.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끔은 씁쓸해진다. 이렇게 보면 선 긋는 일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왜 나는 자꾸 웃음으로 상황을 덮었을까.


난 오랫동안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무례를 농담으로 받아치고, 불쾌함을 웃음으로 넘기는 게 어른의 방식이라 믿었다. 관계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 사람. 그게 나름의 현명함이자 처세술이라 여겼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는 너그러웠던 게 아니라, 불편함을 혼자 처리하는 쪽을 택해온 건 아닐까 싶다.


10년도 더 지난 기억 하나가 여전히 선명하다. 취업 실패와 이별을 한꺼번에 겪던 시절, 친구의 권유로 템플스테이에 갔다. 그와 친한 선배 무리와 함께였다. 일행 중 나만 직장이 없었다. 예불 시간, 스님이 '학업 성취', '취업 성공', '연애 결실' 같이 흔한 사람들의 소원을 차례로 읊었다.


그 순간, 옆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터졌다. 조용한 공간이라 더 또렷했다. 그들은 나를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전날 밤 내가 털어놓은 슬픔이 법당에서 소원처럼 발화되는 장면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나는 따라서 웃었다. 웃지 않으면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될 것 같았고, 정말로 초라해질 것 같았다. 이후에도 그들은 내 상황을 몇 차례 농담처럼 꺼냈고, 나는 번번이 웃어넘겼다.


그 비웃음은 오래 남았다. 취업을 하고, 새 연인을 만나도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불쾌함이었다. 큰 갈등은 없었지만 나는 그들과 멀어졌고, 결국 연락을 끊었다.


이번엔 오랜 친구들과의 카카오톡 단체방 이야기다. 다섯이 있는 방에서 한 녀석은 늘 농담을 주도한다. 자조 섞인 말투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남을 한 번 긁고 그 위에 농담을 덧씌운다. 민감한 화제를 희화화한 뒤 '나 ㅂㅅ?'하고 스스로를 비꼬거나, 친구를 신랄하게 지적한 뒤 '팩폭?'이라며 웃음으로 봉합한다. 반박이 나오기 전에 미리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방식이다.


나는 대개 그 농담을 잘 받아주는 편이다. 'ㅋㅋㅋ'로 반응하고, 때로는 더 센 농담으로 맞받아친다. 나를 향한 조롱에는 내가 먼저 나를 깎아내린다. 남에게 더 이상 깎이고 싶지 않아서다. 돌이켜 보면 이런 방식은 내가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는 방법이라 여겨온 선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톡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나는 생각했다. '이건 나한테 선 넘은 말 아니었나?', '난 여기서 왜 또 웃었지?' 그제야 알았다. 나는 무례함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무례를 혼자 수습해 온 사람이었다는 걸. 그래서 방식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정색을 하거나 관계를 끊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습관처럼 웃어넘기는 반응을 멈춰보기로 했다.


템플스테이에서의 나는 집단의 분위기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카톡 단체방에서는 농담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굳어진 관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힘들다. 현실의 관계는 SNS 조언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다만 이제는 웃음을 조금 덜어내 보려고 한다. 내가 자처해 맡아온 역할, 자리를 잠시 비워두는 것. 그 작은 공백과 쉼표만으로도 대화의 방향과 관계의 온도는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타인의 무례함을 멈추는 건 거창한 기술이나 태도가 아니라, 습관처럼 웃어 넘기며 반응하지 않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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