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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Jan 31. 2018

층간소음, 겪어보셨나요?

언제까지고 위층일 수는 없음을 깨달은 아래층 주민의 이야기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겪고 보니 이게 참 괜히 말 많고 탈 많은 일이 아니구나 절절히 느끼겠어서 털어놓는 이야기. 층간 소음.


오랜만에 시시콜콜 친구들에게 하소연도 해봤고, 비슷한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나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본인이 겪고 나서야 타인의 경험에 비로소 공감하며 응원하는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싶은 존재들이 아닐까.


아이의 울부짖음과,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이를 아무리 호소해도 본인들 육아의 어려움을 이웃도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상으로 전제해 버리는 아이의 부모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또한 그 부모라 한들 설마 아래층을 일부러 골리기 위해 아이를 방치만 하는 것이랴.


헌데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까. 분명한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이는 가해자가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하는 잘못된 일이 아닐까.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를, 포크로 그릇 비벼대는 소리를 참기 힘든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서 그와 같은 소음을 떠올리곤 하는 아래층 사람의 심정을 과연 그들은 얼마만큼 헤아려 봤을까. 돌고래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마지못해 털어놓는 그 마음은 과연 남은 방법이 인정에의 호소뿐인 절박함이 맞을까. 본인들의 괴로움을 이웃에게 나눠 가지라는 태도가 '부탁'이나 '요청'도 아닌 '참아달라'는 말 뿐이라면 그들은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인구 밀집의 과잉 경쟁 사회에서 부대껴 살며 겪는 각종 문제들로 한 때는 프랑스의 '톨레랑스'를 배우자는 운동이 한창이었음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높이까지 가지 않더라도 밤낮으로 괴로운 소음이 들려오는 곳은 바로 내 위층이므로 제 아무리 볼테르가 온다한들 지금의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다. 인간이란 타인의 뼈를 깎는 고통보다 자기 혀의 혓바늘 하나가 훨씬 아픈 존재인데 무슨 거창한 공감이나 가르침이 더 필요하랴.


층간소음을 다룬 각종 언론의 보도에 대해 겪어본 이들은 한 마디씩을 보태고,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때론 그들의 호소에 공감하기도, 때론 그 반대의 입장에서 짐짓 이성적인 척도 하는 흔한 현실. 겪어보기 전에는 천장을 두드리고 우퍼를 설치했다는 이들의 경험담을 그저 치졸한 복수 정도로 여겼던 게 당시의 솔직한 내 심정인데, 이것이 짐짓 이성적이고 교양 있는 줄 알았던 '척'이었음을 깨닫는 요즘이다.


반드시 '복수'란 거창한 목적의식을 지니지 않고도 한밤중에 도저히 시끄러울 때는 화가 나서 벽을 치기도, 고함을 질러 보기도 했으니, 굳이 포장하고 싶지 않은 나의 적나라한 인격은 그렇게 다시 바닥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딱 한 번 위층에 올라가서 마주했던 아이 엄마의 격한 대꾸 이후로 나는 오히려 소음에 더해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라는 스트레스만 늘었으니,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이토록 소모적인 일일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역시나 겪어보니 힘들기만 한 감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고무망치를, 우퍼 스피커를 택하지는 않겠다. 그러느라 사용할 힘은 조금 더 아꼈다가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 쏟고 최대한 집 밖을 벗어나서 소음을 잊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겠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복수를 택하는 많은 이들의 경험담을 더는 내 아래층 일로만 여기지는 않겠다는 사실이다. 내가 막상 아래층이 되고 보니 그 고뇌와 애처로움을 너무나 잘 이해하겠으므로.


고민과 스트레스보다는 대안과 솔루션에 능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능숙하게 내가 처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그건 또 이론적인 얘기일 테다. 우리는 누구나 말할 수 없거나 말하고 싶은 자신만의 짐들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그리고 그 짐이 비록 누가 보더라도 '와~' 싶은 대단한 짐이든 아니면 그저 그런 일상의 짐이든 결국에는 들고 있는 사람만이 안고 가야 할 개인적인 '몫'일 테니까.


아무튼 나는, 

다이소에서 고무망치를 구하느니 차라리 토르의 묠니르가 있는 아스가르드를 찾아 여행을 떠나련다. 그걸 찾아서 위풍당당히 들고 왔을 무렵이면, 위층 아이는 이미 다 자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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