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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r 15. 2018

환자이거나, 보호자이거나.

 종합병원에 들렀다가 풀어내는 종합적인 이야기



종합병원의 로비로 들어선다. 근래에 갔던 분당의 큰 대학 병원에 비해서는 한참 낡은 경기도의 한 대형 병원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보니 입원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금방 찾아냈다. 짝수층 운행, 전층 운행 나란히 붙은 두 대의 엘리베이터 상행 버튼을 꾹꾹 하나씩 누른다. 아직은 이른 오전 시각이라 그런지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와 이를 끄는 중년의 여성이 천천히 밖으로 나온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직 몇 사람이 더 있다. 계속 내려가야 할 엘리베이터다. 닫히는 문을 내버려 두고 도로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방금 내린 휠체어가 지나간 옆자리로 병상 침대 하나가 미끄러져 온다. 침대 위에는 누군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고, 한쪽 끝에는 의료 가운을 입은 젊은 직원 한 명이 철제 난간을 붙잡은 채 멈춰 서 있다. 힐끔 엘리베이터 위쪽 전자계기판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엿보인다. 나는 어느새 침상 위로 옮겨지던 눈길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이를 거둔다. 환자의 모습을 굳이 확인하는 건 어쩐지 예의에 맞지 않게 느껴져서다.  


그럼에도 병원의 각종 풍경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환자도 보호자도 아닌, 병문안을 온 입장이기에 더욱 그렇다. 만약 내가 환자라면 근심 걱정 때문에라도 주위를 둘러볼 여유 같은 건 없을 테고 보호자라면 그런 환자를 간호하느라 여력이 없겠지만, 입원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들른 '건강한' 사람으로서는 병원의 모든 것들이 미안하리만치 눈에 잘 띈다.





층이 바뀌어 입원실로 향하는 복도다. 간호사들이 오가며 내는 발소리가 분주하다. 슥슥 쩌벅쩌벅, 말끔한 병원 바닥을 쓸고가는 그녀들의 흰 슬리퍼가 내는 소리야말로 이곳이 종합병원임을 확인시켜 준다. 문득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사촌 여동생이 떠오른다. 전해 듣기만으로도 참으로 노고가 많은 녀석의 일상을 막상 이렇게 타인의 근무 현장으로 목격하고 날 때면 존경의 마음이 솟아나곤 한다.


회진을 도는 의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근엄하게 앞장서는 노교수의 뒤를 군기가 바짝 들어 보이는 젊은 남자 둘이서 황망히 쫓는다. 흰 가운이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걸로 봐서 수련의 과정일 게다. 이번에는 다른 종합병원에서 의사로 근무 중인 사촌 형이 생각난다. 진작에 인턴, 레지던트 다 지나서 전문의가 된 형에게서는 언제부터인가 여유가 느껴지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주 보는 간호사 동생과는 달리 나이 차도 크고 집도 먼 형과는 왕래가 뜸하다 보니, 의사들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거리가 간호사들에 비해 먼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한다.

        




의료인들을 보며 떠올린 상념도 잠시, 호 수를 보고 찾아간 입원실에 도착하여 나는 이내 현실을 마주한다. 예정된 수술이었던 데다 일반적인 노질환의 하나였다고는 해도 어쨌든 수술 후 초췌한 환자의 얼굴을 마주하려니 안쓰러울 따름이다. 내가 어려서 큰 수술을 두어 번 겪을 때마다 어김없이 맛있는 걸 사들고 찾아오셨던 이모다. 이제는 내가 신경을 쓴답시고 과일이며 간식을 손에 들고 병문안을 왔건만, 막상 이모의 얼굴을 보니 그 시절의 보살핌을 되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모가 있는 2인실의 나머지 침대에는 낯선 할머니 한 분이 누워 계신다. 그 곁의 접이식 매트리스 의자에는 보호자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앉아있다. 그녀는 잠시 내게 눈길을 돌리더니 이윽고 시선을 거두어 창 밖을 바라본다. 별다른 경계심이 담겨있지 않은 덤덤함에 나 역시 신경을 덜고 이모의 침상 옆으로 다가간다. 왜 여기까지 왔냐는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 만무하다. 몹시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이실수록 더 빨리 찾아뵙지 않았음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방문객이었던 나는 그러나 잠시 후부터 보호자로서 이모의 곁을 지킨다.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부탁을 받았는데 과연 이게 부탁받을 만한 일인지 내가 먼저 나섰어야 하는지, 아무튼 잠시나마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어 책임감을 느낀다. 중환자는 아닌 이모의 간병에 특별한 수고스러움은 없으나 그렇기에 더욱 주위 환자들까지 잘 보여서 마음이 홀가분하지는 못하다. 의도치 않게 옆 할머님의 위중한 병세에 얽힌 사연까지 듣고 보니 마주하기가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역시 종합병원이란 썩 평범한 장소가 될 수 없는 곳이다. 환자에게든, 보호자에게든, 혹은 방문객에게든.

    



종합병원에 몇 번 입원해 봤던 나이기에 당시의 기억들도 뇌리를 스친다. 이로써 나는 병원 방문객에서 보호자로, 그러다 결국에는 환자의 입장까지 헤아려 보는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건강이 최고라느니 전화위복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이미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곁에서 아무리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한들 환자와 보호자들이 견뎌낼 시간은 오롯이 당사자들의 의지와 체력에 달려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찌 전혀 힘이 되지 않겠냐마는, 병세와 병세의 호전, 심지어 생과 사가 갈리는 병원 안에서야말로 심적인 위로에 앞서 육체의 회복이 급선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말도 물리적인 치료 앞에서는 공허해지고 마는 곳이 바로 종합병원인 것이다.


이 같은 팍팍함은 몹시 지친 얼굴로 문 밖을 지나는 어느 환자의 얼굴에서 다시 확인된다. 허나 내가 지금 함부로 저분의 고통을 헤아려서는 안 될 일이다. 생면부지의 타인이어서만은 아니다. '병', '질환'이라는 것이 반드시 저이만의 현재나 미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어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파봤고, 아픈 걸 지켜봤으며, 설령 이 과정을 잘 견뎠다 한들 언제고 비슷한 일을 다시 겪을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병실에 오래 앉아 있으려니 엉덩이가 다 아프고 골이 띵하다. 새삼 깨닫는다. 병원이란 공간은 원래 아팠든 아니었든 머물다 보면 반드시 기운이 빠지는 그런 곳이다. 병원 입장에서야 이런 평가가 속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픔이 있기에 병원이 있고, 병원이 있기에 아픔이 있는 건 원래 그러한 법이니까. 여기에는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다. 단지 실질적인 치료 행위들과, 이로써 기대되는 회복 수준을 훨씬 웃도는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가득할 뿐. 이렇게 묵직한 종합병원의 공기가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데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벽에 걸린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누구도 그걸 집중해서 보지는 않는다만 그렇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건 또 아니다. 종합병원에 켜져 있는 TV들 가운데서도 특히 병실 안의 이 기계는 본연의 역할 이상을 충분히 해내곤 한다. 환자와 환자, 환자와 보호자 간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시켜주는 TV의 소음이야말로 어떤 '완충'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서로 말을 안 해도 좋고, 적당히 화제를 돌리기에도 더없이 좋은.  


어느새 기상캐스터가 날씨를 전하고 있을 무렵, 병실에는 간호사 한 분이 들어와서 환자 두 명의 상태를 각각 체크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환자든 보호자든 TV에서 눈을 떼고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유의한다. 링거를 갈아 끼우는 비교적 단순한 의료 행위조차 이들에게는 반갑고 고맙기만 한 도움의 손길이다. 이 같은 돌봄이야말로 환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확인인 동시에 보호자들에게는 마음의 위안인 것이다.


환자이거나 보호자이거나, 둘 모두이기도 했던 나의 헤아림은 이렇게 자꾸만 확장되어 간다. 아무쪼록 현재로서는 이모의 쾌차를 바랄 뿐이지만 그렇다고 종합병원에 오래 머물기에는 피로가 너무 쌓여있음을 느낀다. 이윽고 나는 내 자신이 또한 어떤 면에서는 환자임을 느낀다. 이번에야말로 보호자 역시 스스로 해 내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나 자신도 섣불리 동정하거나 헤아리지 않기로 결심하며 종합병원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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