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돌 Mar 09. 2018

스시는 언제나 옳다.

수시로 찾는 스시집이 있다는 건 꽤나 행운이라구요



*고유성을 살리고자 두 단어 중 '스시'를 우선적으로 사용하되, '초밥'도 뉘앙스에 따라 혼용합니다.



스시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회는 아무리 맛있어도 어디까지나 술과 함께 먹는 안주로 여겨지는 반면, 스시는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점심 식사이자 저녁 식사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서 더욱 좋다. 횟집에서 나오는 횟감은 재료의 싱싱함이라든지 맛의 조화를 판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반면, 스시는 나같은 사람일지라도 플레이트에 올려져 나오는 모양만 보고도 좋고 나쁨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어서 더 정직하게 느껴지는 음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첫인상은 한 입 먹어본 순간 거의 틀림없이 판가름 나기 때문에 스시야말로 먹는 이에게 솔직한 음식이라는 생각이다.


흰 살이든 붉은 살이든, 그도 아니라면 새우나 장어가 올려진 초밥이든지간에 특별히 선호하는 종류가 있지 않은 이상 모듬 초밥에서의 젓가락질은 그야말로 랜덤이다. 재료의 향이나 맛이 약한 순서에서부터 차례로 맛보는 게 나름의 질서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 있어 초밥들은 그 특성에 상관없이 평등하고도 균일한 음식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초밥이 함께 나오는 모듬 초밥을 선호하는 편이다.





음식 뿐만 아니라 다른 취향에서도 특별한 선호를 내세우기 보다는 다양한 것들을 두루 경험하길 좋아하기 때문일 게다. 때로는 개성이 확고한 이들에 비해 뭔가 두루뭉술하고 티미-한 듯한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다. 어느 하나를 줄기차게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의 확신에 비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나의 망설임이야말로 좋게 말해서 유연한 거지 종종 유약하게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다 보니, 싫은 게 많아서가 아니라 좋은 게 많아서 하는 망설임은 차라리 행복한 고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짜장이든 짬뽕이든 확실히 정해서 빨리 주문하는 건 효율성이나 정확성의 측면에서야 좋을 지 몰라도 식사를 음미하는 관점이나 영양의 균형을 고려한다면 두루두루 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런 나라 할지라도 사실 스시집 이외의 식당에서는 '모듬' 접두어가 붙은 메뉴를 잘 시키지 않는 편이긴 하다. '상술'이라고만 하기에는 과하고, 어쨌든 영업의 관점에서 잘 팔릴 만한 품목들을 소량씩 묶어 파는 모듬 메뉴란 어쩐지 '샘플'에 가깝게 느껴진다. 단일 메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득하고 풍족한 맛을 그야말로 '이맛 저맛'으로 대체해 놓은 모듬 메뉴에서는 '이래서 양이 적구나' 혹은 '이도 저도 아니네' 라는 결과를 얻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모듬 초밥은 특별하다. 이것 저것 조금씩 불로 조리해야 하는 다른 메뉴들과는 달리 어차피 갖춰놓은 생선들에서 몇 조각씩 썰어내는 재료의 특성 덕분인지는 몰라도, 스시는 따로 시키나 같이 시키나 그 종류에 따른 맛이 거의 같다. 물론 참치의 예를 들면 오도로냐 가마도로냐 하는 부위별 차이 같은 게 있을 순 있지만 메뉴판에는 각 초밥의 정확한 구성이 나와있기 때문에 고르기 전에 유의만 하면 된다. 원재료의 선택만 같다면, 모듬 초밥의 한 피스와 개별 초밥의 한 피스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초새우든 장새우든 모듬 초밥의 플레이트 위에서는 별다른 분별심이 생기지 않는다. 어느 하나가 안 나와도, 어느 하나를 먼저 먹어도 상관없이 나의 젓가락은 이미 다음의 초밥만을 향해 있다. 새우에 앞서 광어를 먼저 먹었다면 다음에는 연어도 좋고 한치도 좋다. 무슨 초밥을 먼저 먹었느냐에 상관없이 원래의 자리에는 새로운 스시가 얌전히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듯한 일본의 음식 스시는 그래서 일찍이 개인주의가 익숙한 서구 문화권에서 적극 받아들이고 인기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타마고(계란) 스시가 특별히 맛있는 집이라면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다. 게다가 이런 스시집이라면 다른 종류의 스시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맛이 훌륭하다. 반대로 생선 초밥을 먼저 맛 봤는데 영 별로라면, 그 옆에 있는 계란 초밥은 맛보지 않더라도 별로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사람들은 보통 타마고 스시보다는 광어나 참치 같은 걸 많이 찾기 때문이다. 스시집의 입장에서야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은 타마고까지 신경을 쓰기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먹는 생선 초밥이 아닌 계란 초밥 하나의 수준을 통해 스시를 먹고난 후의 만족도가 판가름 나곤 하는 것이다.



문득 어렸을 때 보다 말았던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 이 떠오른다. 하도 유명해서 빌려봤더니 처음에는 신선한 재미를 느끼다가, 점차 일본 고유의 색이 짙게 느껴지는데다 당시만 해도 초밥이 그렇게 굉장한 음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손에서 놓았던 기억이다. 그럼에도 타마고 스시 하나를 위해 어느 계란을 쓰고 어떻게 조리하느니, 또 쌀은 어느 지역의 품종을 사용해서 밥을 짓느니 하는 등의 묘사가 매우 인상깊은 건 사실이었다. 이런 강렬한 기억으로 인해 내가 유독 타마고 스시에서 초밥의 수준과 완결성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문화를 통한 인식의 선점이란 이토록 강렬한 것이다.




내게는 단골이라 할 만한 스시집이 두 군데 정도 있다. 하나는 오랜 친구가 워낙 좋아해서 그로 인해 알게 된 옛 동네의 식당이고, 또 하나는 몇 년 전 여자 친구의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우연히 발견한 식당이다. 한 곳에서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사장님과도 제법 친하게 어울려 당구도 치고, 나머지 한 곳에서는 그저 여자 친구와 늘 둘이서만 초밥 두 세트를 시켜서는 만족해서 돌아오곤 한다. 어느 한 쪽이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두 곳은 내게 있어 나름의 균형을 주는 스시집들이 아닐 수 없다.



꽤 유명하다는 다른 스시집에도 몇 번 가 봤으나 스시에 대해 한참을 떠올리고 난 지금 떠오르는 건 위의 두 군데 뿐이다.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든(이해 관계는 결단코 아닙니다), 정갈한 맛과 친절함이 좋아서든 그보다 좋은 곳이 있으리란 기대는 도무지 안 생긴다. 내가 음식 평론가도 아니고, 수시로 찾는 스시집이 두 군데 정도 있는 것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꽤나 행운이 아닐까? 이쯤되면 나도 더이상 긴가민가 한 성격이 아니라 취향이 확실해 졌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스시 덕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쓰다보면 알게 되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